'민변 이야기/민변 사람들'에 해당되는 글 28건

  1. 2010/08/31 MINBYUN 김제동과 함께한 민변 8월 월례회 후기
  2. 2010/08/17 MINBYUN [인터뷰] 민변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정연순 변호사
  3. 2010/08/16 MINBYUN [지부소식] 경남지부 - 뒤따라 올라 본 함안보 (3)
  4. 2010/07/28 MINBYUN [인터뷰] 민간인 불법 사찰 피해자의 변호인, 최강욱 변호사 (5)
  5. 2010/07/15 MINBYUN [인터뷰] 불온서적 지정에 대한 헌법소원 제기로 파면 당한 前군법무관, 박지웅 회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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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6/28 MINBYUN [인터뷰] 일반교통방해죄 대법원 무죄판결을 이끌어낸 민병덕 변호사
  8. 2010/06/14 MINBYUN [인터뷰] 새로이 임기를 시작하는 김선수 민변 신임 회장
  9. 2010/06/14 MINBYUN [민변 23차 총회 참가기] 총회, 나와 민변을 이어주는 튼튼한 동아줄
  10. 2010/06/03 MINBYUN [회원전용] 4년동안 수고해주신 백승헌, 한택근 변호사님과 정은경 간사님에 대한 사진 선물
  11. 2010/05/27 MINBYUN [인터뷰] 4년 간의 임기를 마감하는 백승헌 민변 회장과의 인터뷰
  12. 2010/05/20 MINBYUN [회원전용/23차총회특집,신입회원의 글] 새로운 만남과 희망의 장, 2010 민변 총회를 기대합니다
  13. 2010/05/19 MINBYUN [회원전용/23차총회특집]2009년 민변 총회를 회상하며_대구지부 성상희 변호사
  14. 2010/05/14 MINBYUN 어중선 신입 간사 인사글
  15. 2010/04/30 MINBYUN [인터뷰] 한명숙 전 총리 무죄판결의 '프로듀서', 조광희 변호사
  16. 2010/04/14 MINBYUN [인터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피소된 시국사건 전문 변호사, 김승교
  17. 2010/03/31 MINBYUN [인터뷰]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마음으로 - 이경환 변호사 인터뷰 (2)
  18. 2010/03/22 MINBYUN 한 인간의 진실이 몹시 그립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의 진실과 승리를 믿으며)
  19. 2010/03/15 MINBYUN 사형제 위헌제청 소송대리인, 이상갑 변호사 지면 인터뷰 (1)
  20. 2010/01/11 MINBYUN [인터뷰]더 많이 못해서 아쉬워하는 마음, 민변 - 김진 변호사 인터뷰 (3)
  21. 2009/11/30 MINBYUN [인터뷰]“더불어 누리고 싶습니다” - 조영선 변호사 (2)
  22. 2009/11/15 MINBYUN [인터뷰]'타고난 민변' 민변의 신입회원 고윤덕 변호사
  23. 2009/07/01 MINBYUN 민변이 맺어준 인연
  24. 2009/06/11 .1241575669 [지리산 산행 후기] 드디어 지리산 주능선 종주
  25. 2009/01/02 MINBYUN_NE [민변이 보내는 편지] 9만 6천여명의 국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24)
  26. 2008/12/31 MINBYUN_NE 철야농성의 그 날을 우리의 미래는 기억하고 추억할 것이다. (8)
  27. 2008/11/21 MINBYUN_NE 우리는 지금 부자나라, 가난한 국민! (3)
  28. 2008/11/09 MINBYUN 법원이여 Blind가 되어라. - 한 변호사의 희망


 

김제동과 함께한 민변 8월 월례회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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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진심, 좋아한다, 인정한다, 반전, 열림, 몰 나쁜 상식, 공감,
이 단어들이 유머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강의에서 김제동은 나에게, 우리에게
어떻게 사람을 웃게 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는 간지럼이라고 답하고 누구는 얼굴이라고 하고
누구는 말이라고 하고 누구는 술이라고도 답했다.

  김제동은 간지럼도 언어도 술도
사람을 웃게 하는 방법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관심, 진심이라고 말했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웃게 하기 위한 진심 담긴 유머는
기술이 부족해도 웃긴 것이고, 눈높이를 맞추는 것,
공감을 하는 것 그것이 유머의 기본이라는 말도 했다.
김제동은 누군가를 웃게 한다는 것은 좋아한다는 것이고
누군가가 웃는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뜻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를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
사랑이 유머를 있게 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고,
한 번도 연결시켜 보지 못한 사랑과 유머가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김제동은 또 웃게 한다는 것은 반전이라고 했다.
 나쁜 상식을 깨는 것, 세상을 바라보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
 어린 아이들의 예를 들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정답' 대신 '가 본다'라는 답을 적는 아이,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 라는 '정답' 대신 '봄'이 된다 라는 답을 적는 아이.
 그 아이들은 나쁜 상식이 없는 몰상식한 상태이기 때문에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태어나서 바로 본 어머니가 못 생겼다고 우는 아이는 없다는 이야기,
참석자들의 공감 가득한 박수를 받았던 '꽃미남'에 대한 성토(?) 등으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열린 사고와 마음,
아이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열린 눈으로 보는 것, 기존의 가치와는 다른 생각을 해 보는 것,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유머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다르게 생각해 보는 것,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 변혁과 유머는 또한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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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동은 웃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도 얘기했다.
지하철에서 신문 넓게 펼치고 읽는 사람 옆에서 해맑게 웃고 비좁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보며 배시시 웃고 그러면
주변 사람들이 (미친 사람인 줄 알고) 떠나줄 것이라는 얘기. 농담처럼 한 이야기이지만
김제동이 하려는 말은 유머가 가진 '사람과의 소통의 힘',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유머는 tv 개그콘서트나 토크쇼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 어디에나 있고
 사람과 세상과 소통하는 유효한 수단이라는 깨달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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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제동은 강의를 마치면서
홀로 앞서 나가는 것보다 함께 나가는 것이 중요하고 비가 올 때 비를 같이 맞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김제동이 하고 싶었던 말은 유머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보며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꾸는 아이 같은 마음이며,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효한 도구라는 것 아니었을까.

 오늘은 개그를 유머를 가볍게만 봤던 것을 반성할 일이다.
유머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같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고, 살면서 유머감각을 잃지 않도록 경계할 날이다.





 - 글 /  조현주 변호사 




 

2010/08/31 13:36 2010/08/31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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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에 새 집행부가 출범한지 벌써 석 달이 되어간다.
  새로운 집행부가 돋보이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민변 최초로 여성사무총장이 취임했다'는 점일 것이다.

  서글서글한 외모와 부드러운 화법이 편안함을 주지만
  일처리는 깐깐하다고 알려져 있는 정연순 변호사,
  민변의 새로운 사무총장을 만나 '민변'과 '변호사'로서의 '개인사'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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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변 최초의 여성 사무총장



- 민변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으셨나요?

 
 제가 연수생일 때 법무법인 ‘덕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만난 선배님들이  이돈명, 최병모 변호사님 같은 대선배님들과 이석태, 김형태, 조용환 변호사님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었죠. 그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변호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는데요,
그분들이 모두 민변 회원들이셨기 때문에 변호사 되는 것과 민변가입은 완전히 동일한 걸로 생각했습니다. (웃음)


- 여성위원회에서도 큰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위원장으로 있을 때 여성위원회가 모범위원회로 상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제가 잘해서라기보다 후배들이 잘해준 덕분이에요. 김진, 이상희, 이정희 변호사 등 후배들이 정말 활발하고 모범적인 활동을 해주었거든요. 저는 살아오면서 늘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운이 좋았던 거죠.


- 벌써 사무총장하신 지 두 달 반이 지났습니다. 느끼신 점이 있다면요?

 총장으로 일해 보니 민변이 정말로 사회각계각층으로부터 많은 일을 요구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이 일을 다 어떻게 해내지 하면 또 회원 분들이 마다하지 않고 다 맡아서 잘 처리해줘서 총장으로 일하는 것이 처음 생각보다는 그리 큰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회비만으로는 지금 사업들을 적절하게 수행하기에는 좀 모자라요. 전임 집행부가 발전기금을 넉넉히 마련해줘서, 그 일부를 예산에 전용하고 있는데요, 남아있는 기금과 소진속도를 보면 제가 일하는 기간 동안은 괜찮을 것 같은데, 곳간을 비워놓고 나가면 안 되니까, 자나 깨나 돈 걱정을 하고 있는 게 하나입니다.(웃음)
 마지막으로는 여러 사정 때문에 활동에는 적극적으로 결합 못하시는 회원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가는 과제인데요, 요즘 시국이 시국인지라 계속 닥쳐오는 시급한 일들에 급급해서 이를 어쩌나 하고 있지요. 


- 회원들께 바라는 점이 있으신가요?

 회원들에게 어떤 불만이나 요청이 있지는 않아요, 집행부가 어떻게 하면 더 잘해드릴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다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회원들이 사무처에서 마련한 월례회 등의 전체 모임에 시간을 내서 꼭 참여하셨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지금 변호사 업계가 큰 지각변동을 겪고 있지요. 우리 모임에는 관록 있는 선배들도 계시고, 달라진 상황에서 고생하고 있는 젊은 후배들도 많습니다. 서로가 변호사로서 공통으로 가지는 애환이랄까. 어려움도 있고 서로 다른 고민도 있는데요, 시간되면 이런 모임에 나오셔서 선후배간에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고 다독이며 힘을 얻어가셨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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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시정본부장


- 총장님 경력을 보면 2006년부터 2년 반 동안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일을 하셨는데요.

 네, ‘전무후무한 차별시정본부장’입니다.(웃음) 2006년에 차별시정본부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들어갔는데, 제가 나온 뒤로 인권위가 축소되면서 차별시정본부가 없어져서 조사국으로 통합되었지요. 제가 일하는 시기에, 비록 국회에서 통과되진 못했지만 ‘차별금지법’ 안이 만들어졌고, ‘장애인 차별금지법’과 ‘연령 차별금지법’은 제정, 발효되었지요. 지금 정권에서 반차별운동이 좀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른 나중에 돌이켜 보면 차별금지법 제정역사의 획을 그은 시기라고 평가될 그 때에 관련 기관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게 개인적으로 매우 보람 있고 뜻 깊습니다.


- 민변에서도 얼마 전부터 ‘(가)소수자인권위원회’의 발족을 위한 준비모임이 만들어졌죠?

 소수자 인권의 문제는 그 바탕에 ‘사회적 차별’이라는 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민변이 전통적으로 ‘시민의 정치적 권리’ 쪽을 옹호하다 보니, 사회적 차별 시정 분야에 대한 관심이 좀 적었고, 회원들의 개별적 활동들은 있으되 조직의 활동으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행부의 출범과 함께 그동안 개별적 활동을 해오시던 회원들이 모여 ‘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해주셨어요. 역시 저는 운이 좋은 편이죠, 가만있는데 이렇게 일을 하겠다고 나서주는 회원들이 있어요(웃음) 정말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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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호사 정연순


- 여성변호사의 수가 많지 않을 때에 변호사를 시작했는데요, 왜 법조인의 길을 선택하셨나요?

 대학에 다닐 때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이라 뭐, 데모하러 다니고 수업거부에 시험거부 하다 보니 학업에 소홀해져서 학점이 안 좋았어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4학년이 되었는데, 정말 졸업하면 어디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내밀 수 있는 학점도 못 되어서요, 그래서 ‘에이,  사법시험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시험을 봤는데요. 다행히 그리 늦지 않게 합격했어요. 역시 운이 좋았죠. 시험 준비 과정에서 딱 한번 왜 법조인을 하려고 했을까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사회적 이슈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일로써 공헌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만족합니다.  


- 업무의 질로 평가받아야 하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이 녹록치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개척을 해나가고 계신 ‘언니그룹’이신데,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려요.

 대부분이 ‘가정’과 ‘사회적 평가’, 두 가지를 다 성취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는데, 정말 힘들어요. 남자들은 대부분 하나를 내조해주는 사람이 있지만, 우리는 ‘마누라’는 없고 ‘남편’만 있으니까요.(웃음) 두 과제를 양립시키는 게 고통스럽죠. 저도 힘들게 겪어왔고, 그렇게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쓰럽지요. 남성들과 동등한 사회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 가진 능력 100을 50:50으로 배분하는 게 아니라 더 쥐어짜서 130이나 150을 해야 겨우 동등하거나 따라가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언니들이 그렇게 살아왔으니 후배들 너희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한국사회가, 남성들 역시도 너무 ‘과잉사회화’되어 있거든요,  ‘근로시간을 줄이고 가정과 사회가 양립 가능한 사회’로 만드는 것은 남성과 여성, 우리 모두의 과제에요. 더구나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에 충실한 게 사회적 성공 못지않게 중요하고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것임을 저도 알기에, 그걸 버리고 사회적 요청에만 헌신하기를 요구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뭐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오른 여성들의 경우에는, 책임의식이나 책무를 조금 더 강하게 느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이 스스로 잘나서 거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 그런 여성 하나를 키워내기 위해 사회적 비용, 사회 구성원들의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 있거든요. 그 여성들은 자신들이 쌓아온 자산을 그 구성원들을 위해 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때문에, 장기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서 가정과 사회가 양립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것과는 별도로, 그것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선도적이고 좀 힘겹게 살아야만 하는 여성들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문제제기도 적극적으로 해줘야 하고 롤모델도 만들어줘야 하는데, 후배들을 보면 그 역할을 요구받을만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까, 만나면 자꾸 어떻게든 130, 150을 해보라고 닦달하니까, 후배들이 저보고 깐깐하다고 하나 봐요(웃음).. 너무 안타깝지만 말입니다.


- 굉장히 많은 사건들을 맡고 계시고 또 맡아 오신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사건을 말씀해주세요.

 변호사 경력이 이쯤 되면 누구나 가슴에 두는 사건들은 많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사건이 하나 있는데요, 성매매 여성이 포주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해서 결혼까지 해서 살다가 추적해 온 포주에 의해 차용금 사기로 고소당한 사건을 무료변론 해준 적이 있어요. 3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정말 힘겹게 재판을 해서 항소심에 가서야  무죄를 받았는데요, 처음 시작했을 때 뱃속에 있던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서 재판정에 데리고 오가면서 겨우 무죄를 받았지요. 나중에 후배들이 그 변론기록을 참고로 성매매여성들을 위한 변론매뉴얼도 만들었고, 그 여성분뿐만 아니라 한 아이와 남편까지 ‘한 가정’을 끝내 지켜냈다’는 점에서, 지금 생각해도 뿌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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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적인 이야기


- 남편분이 백승헌 전임회장이신데,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것에 있어 어떤 부담감이 있나요?

 총장직을 수락하기까지는 솔직히 부담스러웠어요. 하지만 막상 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전혀 그런 건 없고, 오히려 가까이에 있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다만 그럴 경우 자꾸 이야기가 길어져서, 저희 집에서 ‘민변’은 ‘금칙어’ 처리된 상태입니다.(웃음)


- 저 역시도 정연순 변호사님의 차기 총장 내정 소식을 듣고,  세습 의혹을 제기한 사람인데요.
  의혹을 해소해주십시오.(웃음)

 
민변의 회장직은 선출직입니다. 그러나 하시겠다고 적극 나서시는 분들이 없어서 경선을 한번도 못해보고 전임회장이 회장후보자를 섭외해두고 나가긴 하지만, 나머지 집행부 임원은 전적으로 신임회장이 결정하지요. 그런데 김선수 회장님이요, 딱 던져 놓고서는 다른 가능성도 전혀 타진해 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시는 그 수에 결국 성질 급한 제가 말려서 그만 수락을 하게 되었는데요(웃음). 회장직이면 모를까, 총장직은 전임회장이 관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은 세간의 오해라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많은 기혼 여성분들이 ‘여성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로 취급받는 일이 많습니다. 
  정연순 총장님은 특히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시다보니 특히 그런 일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남편이 저보다 8년 선배예요. 출발할 때부터 그 사무실의 선배였고, 민변에 들어와 봤더니 또 민변의 창립멤버였습니다. 관계 자체가, 좀 불리했죠(웃음). 사회적 명망에 많은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정연순 변호사’보다 ‘백승헌의 아내’로 불린 경우가 꽤 있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면, ‘8년 선배랑 맞먹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이상했던 거죠. 반대로 제가 8년 선배였으면 ‘백승헌 변호사’가 ‘정연순의 남편’이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게 그때에는 ‘여성적 문제의식’과 결합되어서 잘 극복이 안 되더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른 사람들은 심각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닌데도 상처를 받은 적이 꽤 있었어요. 이제는 후덕한 아줌마가 되었고, 유학도 가서 좀 떨어져도 지내고 3년 가까이 인권위 활동을 하며, 다른 커리어와 네트워크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극복이 되었지요. 


- 지난번에 백 변호사님이 인터뷰에서 “대부분은 제가 정 변호사에게 도움을 줬다고들
  생각하는데, 역으로 저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었죠. 저희 부부는 변호사로서도 오랜 기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 왔는데요, 그래서 서로가 지루해 하지 않을까 하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다행히 저희는 둘 다 지적 탐구욕이 많아서요. 변호사라는 직업과 그런 특성이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성장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얼마 전 잡지에서 ‘공명’에 관한 글을 봤는데, 사람마다 특정 주파수가 있고, 그 주파수가 잘 맞는 사람끼리는 인간관계가 굉장히 편안하다고 해요. 남편과 저는 주파수가 비교적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이해력이 빠르고, 쟁점을 정확히 보고자하고, 그것을 처리하는 논리적 사고방식에서요.


- 변호사 업무에, 민변 총장직에, 그리고 얼마 전까지 학업도 같이 하셨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 많은 일들을 소화해내고 계시는 동력이 뭔가요?

 글쎄요. 아마도 첫 번째는 제가 호기심에, 유약한 마음에 여러 일을 맡는 것이 문제가 아닌가 싶구요. 다만 그 일들을 어찌 해나가느냐는 질문에는 꼭 잘 해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버티는 것 같아요. 그게 제가 범생이로 자라며 한 번도 부모님을 실망시켜본 적이 없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부모님의 기대와 어긋난 일을 하고 심지어 부모님을 속이고 다녔거든요. 그때부터 ‘내가 선택해서 하는 일은 잘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해졌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힘이 부칠 때가 없지는 않지만, 그걸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라도 즐겁게 일하려고 노력해요. 이왕이면 재밌게, 즐겁게..  이런 마음자세를 아침마다 외워 보곤 합니다.


- 두 아이의 엄마시라고 들었습니다.
  아이들, 혹은 인생의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산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유치하게도, 동일한 시험을 치르고 비슷한 성적으로 들어와 대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이 그 뒤에도 비슷한 인생의 궤적을 그리며 살아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25년이 지나 보니 너무들 달라져 있더군요. 심지어는 19년 전에 사법연수원에 같이 들어간 동기들도 각자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요. 무엇이, 어디서 그 차이가 벌어졌을까,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제가 딸과 아들이 있는데요,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 지를 늘 성찰할 수 있고, 주체적으로 결정해 나가면서 나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것 그 이상은 없어요. 지금 아이들을 보면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 사회라서 그게 안타깝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인터뷰 / 출판홍보팀 김란아 인턴  




 

2010/08/17 13:09 2010/08/1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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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라 올라 본 함안보




 부끄럽게도 이 사건 전에는 4대강 공사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은 ‘함안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창원-그래도 지방 도시치고는 큰 편에 속하는 곳입니다-, ‘함안보’는 함안 어디쯤 아주 시골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지난 7월 마지막 날 가본 함안보는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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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은 원래, 함안보에 올라가 있는 활동가 2분(이환문, 최수영)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 있어, 의사선생님 2분이 인도적 차원의 진료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활동가 두 분의 변론을 맡게 될 것이라는 이유로, 의사선생님들과 함께 경찰의 인도(?)에 따라 함안보 공사 현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함안보 공사 현장은 마치 요새 같았습니다. 공사 현장은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높은 펜스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반인들이 다니는 길가에서는 활동가 2분이 올라가 있는 크레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그 높은 철책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규모의 함안보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공사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섬처럼 서있는 크레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활동가 두 분은 사실상 감금상태였습니다. 크레인 주변으로는 언제든지 연행이나 작전이 가능할 정도의 경찰력이 대기상태로 있었습니다. 가물막이 공사가 끝난 위로 경찰 지휘 본부가 있었습니다. 차로 가물막이 위를 달려 그곳에 도착하기까지도 저는 제가 밟고 지나가는 그 넓은 곳이 가물막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얼핏 대학 때 가본 춘천댐 위를 지나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사현장의 규모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경찰과 실랑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과 저의 안전을 위해 경찰이 함께 크레인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 경찰이 내건 진료 조건이었습니다. 크레인 위에 계신 분들은 단호히 거절하였습니다. 경찰이 올라온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활동가분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크레인은 겨우 한명이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좁은 사다리로 40여 미터를 오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을 의사 선생님 2분과 저 그리고 경찰이 오르게 되면 그것이 더 위험한 것 아닌가, 경찰이 대동한다고 해서 더 확보되는 안전이 무엇이 있는가, 변호인과의 접견 교통권을 침해하는 것인가 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경찰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책임은 자신들에게 있고 크레인 위의 활동가 2명이 저희들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저와 의사 선생님들이 크레인에 오르는 것까지 경찰이 감독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날은 너무 더운 날이었습니다. 그늘 하나 없는 공사장 한가운데에서 경찰과 1시간 가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의사선생님 2분이 진료를 하시는 동안은 경찰이 함께하는 것으로 하고, 제가 활동가분들을 만나는 동안은 경찰이 크레인 아래에서 대기하는 것으로 절충이 되어, 먼저 의사 선생님들이 크레인에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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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인 아래에 도착해서 위를 올려다보니 크레인은 하늘을 향해 끝도 없이 이어진 것처럼 높아보였습니다. 저희는 사실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꼭대기까지 오를 자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활동가 두 분이 크레인 중간지점까지 내려오신 덕에 수월하게 진료와 접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선생님들의 진료가 끝나기까지 내리쬐는 여름 볕 아래서 기다리기를 40여분. 막상 제가 올라갈 때가 되자 저는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활동가 두 분이 그날까지 10일 동안 어떻게 그곳에서 버티신 건지(그동안 심한 폭우와 비바람도 지나갔었습니다) 경이로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래도 크레인에 올라 이환문 진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님을 만나 민사 가처분(건설회사 측에서 활동가 2분을 상대로 크레인에서 내려올 것을 청구하면서 1일 2,000만원의 간접강제금을 신청하였음)과 형사절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위에서 보니 주위의 고즈넉한 풍광과 함안보 공사 현장이 너무도 대비를 이루어 절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저는 그 다음날 결국 몸살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았습니다. 그 곳을 몰랐던 것도 부끄러웠고, 말이 아닌 행색으로 10일 동안 공사장 밖에서 천막을 치고 크레인 위의 분들에게 힘을 보태주고 계시던 시민단체 분들을 보기도 부끄러웠고, 그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그 곳에 있는 동안 찾기도 어려운 시민단체의 천막 농성장을 직접 찾아와 격려를 해 주신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천막 아래로 그 분들을 모시면서 어떻게 오신 것이냐고 물으니 그냥 평범한 시민이고 와 봐야할 것 같아 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대목에서도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결국 저는 두 분의 활동가를 위해서 크레인에 오른 것이 아니라 저를 위해 올라야만 했던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 뒤로 크레인 명도 단행 가처분 심문이 있었고, 두 분이 크레인에서 내려오신 후 체포되어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있었습니다. 민변 경남지부 변호사님들과 부산의 강동규, 변영철 변호사님과 함께 열심히 변론을 하였습니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구속영장은 기각되어 지난 8월 13일 두 분 모두 풀려나셨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고, 유한한 권력은 언젠가 그 끝을 볼 것이며, 오늘의 이 현장도 모두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그 심판에서 조금은 떳떳하고자 오늘도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 글 / 박미혜 변호사      




 

2010/08/16 11:28 2010/08/16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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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대학생 유시민이 항소이유서에 인용한 러시아 시의 한 구절이 가슴에 박혔다. 이후 그는 조국의 불합리한 국가권력,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슬퍼하고 노여워했다. 사랑하는 이에게도 슬퍼하고, 노여워해야 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육군 장성 진급 비리 사건, 한미연합부사령관 횡령 사건, 기무사 민간인 사찰, 불온서적 사건 등은 ‘최강욱 변호사’를 키워드로 치면 나오는 사건들이다. 뒤틀린 ‘권력’에 노여워한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최 변호사는 스스로를 ‘평범한 일상을 원하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이런 그에게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이 자꾸 다가오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 아직까지 ‘평범하지 않은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강욱 변호사에게 또 하나의 ‘평범하지 않은 일’이 다가온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몇 년 전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함께 한 김종익 씨가 국가기관의 사찰을 받고 있다고 연락을 해온 것이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야기 내용에 자체에 ‘법률가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깊이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최강욱 변호사가 본 김종익 씨는 절대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김종익 씨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한다며 답답해했다. 국가기관의 개인에 대한 권력 남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 대한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27일, 최강욱 변호사를 만나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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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피해자인 김종익 씨의 변호를 맡고 계십니다.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국무총리실은 자체조사를 거친 후 사찰을 지시한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을 포함해 3명을 직위해제했고, 사건은 현재 검찰에서 수사 중입니다. 일부는 구속되기도 했고요. 지금까지 김종익 씨가 당한 사찰의 내용과 피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을 했는가, 사찰을 당한 사람이 김종익 씨 뿐인가, 누가 지시했는가를 밝히는 일 같습니다. 관련자 처벌과 손해배상 문제 또한 남아있고요.


- 직장까지 잃게 만든 외부 압력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당한 사찰의 내용을 언론에 밝히기까지
  순탄한 길이 아니었을 덴데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김종익 씨가 사찰을 당한 것은 시일이 조금 지난 일입니다. 2008년 9월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당시 국무총리실에서 김종익 씨를 반정부적인 인물로 지목하고는, KB한마음(현 NS한마음) 대표이사직을 사퇴하고 지분을 모두 내놓으라는 압박을 가했습니다. 김종익 씨는 더 이상 봉변을 안당하기 위해 국내에 대리인을 선임해놓고 잠시 일본으로 떠납니다. 그간 총리실에서는 김종익 씨의 카드 사용내역 등을 샅샅이 뒤지고 탈세, 공금횡령 여부를 조사하는 등 내사를 벌였지만 흠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2008년 11월에 국무총리실장명의로 동작경찰서장에 수사 의뢰 공문을 보냅니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였습니다.

 처음에 김종익 씨를 수사한 경찰관은 무혐의 의견을 냈지만 결재 과정에서 묵살되었고, 동작경찰서는 수사진을 교체한 후 기소 의견을 달아 사건을 검찰에 송치합니다. 검찰에서는 2009년 10월이 다 되도록 시간을 끌다 결국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어요. 김종익 씨는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경찰관이 자리를 자꾸 비우는 사이에 기록을 들춰보다가 총리실에서 보낸 공문서를 봤습니다. 제 생각에 그 기록만 확보하면 사건의 실체가 분명해지고, 손해배상 소송 역시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김종익 씨는 피의자로 입건돼 기소유예를 받았기 때문에 방법이 한정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검찰이 내린 기소유예 처분을 취소하라는 헌법소원을 제안했습니다. 헌법소원을 하면 수사기록을 송부해주는데, 그 수사기록에 김종익 씨가 본 총리실 문건이 포함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09년 12월에 헌법소원을 내고, 헌재에서 기록이 제출됐다고 연락이 와서 복사를 해보니 진짜 총리실 문서가 있지 뭡니까!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습니다만, 한 사람을 사찰한 흔적이 공문서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참 황당하고 분했었죠.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기록이 손 안에 들어왔는데도 김종익 씨는 한참동안이나 기록을 못 보셨어요. 사찰을 받던 일이 생각나서 두려웠기 때문이겠지요. 또 힘든 일을 당하시다 보니 그간 많이 아프셨습니다. 지난 5월 달 쯤에야 저에게 연락을 하셔서 이 일을 세상에 알리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결심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죠. 김종익 씨가 1년 넘게 고민한 것의 상당 부분이 ‘피해가 여기에서 끝날까’하는 공포였어요.


- 김종익 씨가 노사모의 핵심 인물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이 가진 기득권에 해가 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쓰는 동일한 수법이 ‘물타기’입니다. 본질을 흐리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나, 사회적․집단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나 그 기제가 같습니다. 이는 진실을 가리고자 하는 권력계층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사례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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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무총리실은 왜 그렇게 집요히 민간인에 대한 조사를 진행한 것일까요?

 수사기록을 보면 촛불집회 자금 지원 여부, 동향인 이광재 강원도지사와의 친분, 노사모와의 관련성을 집요하게 묻습니다. 왜 사찰을 했을까는 수사기록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2008년 촛불집회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 주변 사람들을 조사할 때 김종익 씨가 확인되지 않은 어떤 경로로 걸려들었다는 개연성이 높습니다. 누가 김종익 씨가 평창 사람이고, 이광재 도지사와 가까울 수 있으니 조사해보라는 제보를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배경과 관련해서는 지난 정권과 가까운 사람을 손봐주겠다는 의도가 작용한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의 의미나 본질을 무엇으로 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리나라 헌법에는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은 민주적 기본질서를 무너뜨리고, 법치주의를 완전히 파괴한 사건입니다. 그간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술했고, 권력자가 말하는 법치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국무총리실이 자체 조사를 하기 이전에도 얼마든지 다른 국가기관들이 진실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치되었습니다. 국가기관들이 권력자의 의중만 살필 뿐 헌법이 정하고 있는 기관의 기본적인 사명을 망각한 겁니다. 권력의 잘못된 지시가 있었을 때, 공직자들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언로가 모두 막혀버렸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봅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달성했다는 민주주의의 수준과 공직자들의 복무자세에 대한 문제가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 사건과 관련된 향후계획이 궁금합니다. 또 김종익씨께서 직장을 잃으시는 실질적 피해를
  당하셨고, 정신적 고통 또한 호소하셨는데요, 사건 해결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일단 손해배상과 관련자 처벌을 통해 김종익 씨가 받은 피해가 회복되어야 하겠죠. 수사 결과를 끝까지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수사 과정에서 흠집내기를 하는 정치인과 일부 언론에도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계획입니다.

  이번 사건이 국민적인 공감대를 얻은 이유는 누구나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종익 씨는 배상에 앞서 사찰에 시민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도와 절차가 정비되길 바라십니다.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보도나 의견이 나와야 하는데, 너무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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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강욱 변호사님께서는 군법무관 생활을 8년 하시고 2005년 전역하셨습니다. 군법무관 생활을 하시던 중
  2001년 군법무관임용법에 대한 헌법소원, 2004년 신일순 한미연합부사령관 공금횡령사건 수사, 육군장성
  진급비리 수사 등을 진행하셨는데요, 전역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요?

 현역 대장을 구속한 사건 이후 바로 이어진 육군장성 진급비리 사건 때문에, 군에서는 제가 전역을 안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죠. (웃음) 군법무관으로 있는 동안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에 대항해 지긋지긋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나가서 해야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역 당시는 참여정부 사법개혁위원회가 군사법제도개혁을 논의하고 있을 때입니다. 저도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어 전역했는데,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죠.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논의한 주제 중 첫 번째로 위원회 의결을 통과했던 주제가 '군 사법제도'입니다. 너무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유일하게 개선되지 않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당시 사법개혁의 주제 중 검경수사권조정, 국민참여재판, 공판중심주의 등 민감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통과가 됐어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은 군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고, 이 세력이 사력을 통해 개혁을 막았는데 정작 개혁하는 쪽에서는 본질을 몰랐던 거죠. 그래서 또 방치되어버리고 말았고요.


- 現 군사법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애초에 군사재판제도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나라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시초라고 할 수 있죠. 인도에서 식민지를 경영해야 하는데, 인도 법원에서 자국민을 재판하면 불리하니까 군대에 대해서는 스스로 재판권을 갖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국은 EU에 가입할 때 군사재판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유럽인권규약에 반한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효과적으로 군사재판 제도를 운영하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입니다. 우리나라의 군사법제도는 해방공간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입니다.

 한국현대사의 불행한 사건은 대부분 군사재판에서 이뤄졌습니다. 제도가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합리합니다. 군사재판에서, 판사가 아닌 사람이 꼭 한 사람 있는데, 그 사람이 재판장을 맡습니다. 예를 들어, 합참의장을 처벌하고자 하면 그 사람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재판장이 되어야 하는데 군에 합참의장보다 높은 직위는 없습니다. 처벌할 구조가 아예 없는 셈입니다. 지휘관은 경찰부터 검사, 판사, 재판장을 모두 임명할 수 있고, 형량을 마음대로 깎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제도가 아직 우리나라에 있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 위계질서가 확실하고 비밀주의가 강한 우리 군에서 헌법소원을 제기하거나, 비리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일례로, 불온도서 헌법소원을 제기한 군법무관 두 명이 파면되시지
  않았습니까. 그 중 한 명이 민변 박지웅 회원이시고요.

 우리가 이룬 민주화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는 군대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군대가 민주화되어야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완성될 수 있습니다. 민주화를 저해하는 대표적인 집단과 세력이 군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세월이 50년을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아닌 것, 군인 출신이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을 민주화라고 생각했지 군의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군을 사고에서 배제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은 지금도 제 맘대로 입니다.
 
 이는 천안함 사태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소통, 투명성, 토론과 전혀 무관한 조직이 바로 군 아닙니까. 불온서적 지정 등과 같은 전근대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사람들은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군대니까 그렇다’고 하는데, 군대는 왜 그래야 할까요? 군대가 그래야하는 이유를 생각해보고 문제를 식별해서 고쳐야 한다고 봅니다. 사법제도개혁을 이야기 할 때도 법원, 검찰만을 논하지 군사법제도는 빼놓습니다. 군법무관으로서 군의 문제점들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나왔기 때문에, 제 나름대로는 소중한 경험이고, 이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 ‘평화군사법학회’에서 활동 중이시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로 어떤 주제로 연구를 하시나요?

 군인의 인권문제, 군사법제도 개혁문제, 또 평화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살펴보려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이나 고통의 뿌리가 군사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여성학을 하시는 분들도 점점 많은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학진에도 등록되었으니, 정식 학술단체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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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에 가입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현재 민변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군 전역 후 참석한 군사법학회 모임에서 이정희 의원을 만났는데, 아직 민변에 가입하지 않았냐고 묻더군요. 이정희 의원도 군사법학회의 회원입니다. 저도 가입을 위해 민변 홈페이지를 찾아가 봤지만 절차가 좀 어려운 것 같아 시간을 끌고 있던 차에, 이 의원을 통해 민변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올해 5월까지 민변 사법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지금도 사법위원회에서 활동 중입니다. 요즘은 자격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 위원장을 맡아서 민변에 피해를 끼친 사실을 자성하면서 보내고 있어요. (웃음)


- 작년에 「무엇이 시민을 불온하게 하는가」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집시법, 용산참사, 삼성특검 등 이슈가 되었던 다양한 사건들을 법적으로 살펴보는 내용인데요,
  제목이 주제들과 참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목을 어떻게 결정하게 되셨고,
  책 출간 계기는 무엇인가요? 향후 준비하고 계신 책이 있으신지요.

 책은 KBS1 라디오의 ‘라디오 정보센터 왕상한입니다’에서 제가 진행했던 뉴스 해석 코너를 묶은 것입니다. 출간이 제 의지는 아니었고요, 출판사에서 기획 한 후 제의를 해주셨습니다. 제목도 출판사에서 정해주셨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반대했습니다. 저는 ‘불온’이라는 단어가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국방부 불온서적 지정 문제가 화제가 되고 있어서, 거기에 편승하는 것도 싫었고요. 책이 많이 안 팔려서 출판사 분들이 손해 보셨을 겁니다. (웃음)

 저는 김두식 교수가 쓴 「불멸의 신성가족」 같은 책을 꼭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고 좌절했어요. 저는 그 이상 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군대와 관련된 인권 문제, 부정부패 문제에 대한 책을 써서 사회에 기여하고 싶지만 아직은 능력이 부족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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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출판홍보팀 박초롱 인턴
 사진 / 출판홍보팀 김란아 인턴



 

2010/07/28 20:23 2010/07/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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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6월호「민주사회를위한변론(민변이 발행하는 격월간지)」에는
<불온한 판결, 시대의 역주행>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바로 '군법무관 파면 취소' 기각 판결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요.
이번 25호 뉴스레터에서는 그 판결의 당사자인 前군법무관 박지웅 회원을 만나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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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지웅 회원님 하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는 이유로 파면 당한 군법무관’이시라는 겁니다. 헌법소원을 제기하신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2008년 8월에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는데, 아무래도 직업이 법률가이다 보니 소송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지켜야할 내부절차들을 거쳤는데, 이야기를 해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조직 내부에서 어떤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들고, 사실 불가능해요. 그럴 때 합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 중 하나가 ‘헌법소원’입니다.
 군법무관이라는 게, ‘헌법질서’를 지키라고 있는 것이잖아요. 불온서적 지정이라는 것은 굉장히 권리침해적인 것이기에, 실효성이 얼마나 있든 간에 상징적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에서 예민하게 반응할 거라는 예상은 있었지만, 다들 조심해서 대응을 하되 하기는 하자는 의견이 다수였어요. 실제로 시간이 더 있었다면 참가했을 사람도 더 많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군법무관들이 나선 이유는, 병사들이나 일반 장교들은 신분보장이 안 되니, 어차피 변호사 할 사람들인 군법무관들이 구애받지 말고 하자고 이야기가 된 겁니다.


- 파면을 받기까지의 경과는 어떻게 되나요?

 10월 이후, 군의 감찰(민간의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국방부는 저희가 군을 흔들어놨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소송을 냈지, 죄를 지은 게 아닌데, ‘조사’를 받는다는 건 형식이 좀 이상했지만, ‘항의’가 목적인 것처럼 비치는 건 좋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기에 간단히 조사를 받았습니다. 군에서도 징계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던지, 다섯 달 정도를 미루다가 징계를 내렸습니다. 7명의 군법무관이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저를 비롯해 두 명이 파면을 당하고, 나머지 분들은 감봉과 같은 경징계 처분을 받았어요. 공안사건의 상 수괴, 모집책, 행동책의 개념을 적용한 것 같습니다.(웃음) 소송제기 행위가 잘못된 거라면 누가 주동했느냐 아니냐가 불법성의 차이를 가져오진 않을 텐데, 똑같이 소송을 낸 사람들이 다른 징계를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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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법무관이 파면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파면이 취소가 되면, 파면되어 군에서 나와 있던 기간이 산입되면서 그동안 밀린 월급을 받고 남은 병역기간을 복무하게 됩니다. 취소가 안 되면, 불명예제대가 되고 병역의무는 완료되는 거예요. 
 변호사 자격은 유지가 되는데, 파면일로부터 5년간 변호사 영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취소를 받아야죠.


- 얼마 전, 파면 취소 신청이 기각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나가실 것인지를 말씀해주세요.

 파면 취소 기각결정에 대한 항소심 준비서면을 최근에 냈습니다. 상대방이 반박 준비서면으로 답변을 하면 9월 정도에 변론기일이 잡힐 거고, 10~11월 정도면 아마 결론이 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군법무관들과는 소송 준비 때문에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고, 취소를 받아야 하는데,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직자의 파면이라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뇌물, 축첩, 형사처분과 같이 중대한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한 건데, 함부로 파면을 시킨 사람들에 대한 응징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두 번 다시 이런 희생자를 만들지 않도록 선례를 남겨야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고액의 위자료 청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자료를 청구하여 승소할 경우에는 그 돈을 절 도와주신 인권사회단체들에 기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 국방부의 불온서적 지정의 위헌성 중, 특별히 초점을 맞추시는 부분이 있다면요?

 사상의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사상의 자유보다는 ‘알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23권의 책을 면면히 보면 ‘어떻게 이런 책들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할 생각을 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의식화의 교재로 사용하는 책들이 많아요. 병영도서관에서도 그 책들을 누군가는 한 번씩 볼 텐데, 책을 접함으로서 정확한 역사인식에 바탕을 둔 인생관 같은 것들이 정립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책들을 접하지 못하는 병사들이나 장교들은, 계속 군에서 주입시키는 이데올로기만을 가지고 인생을 살겠죠.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그런 게 중요하고, 그런 게 ‘알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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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법무관 파면 사건과 관련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워낙 좋아하기 때문에, 혼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보면 어떨까 싶어 한겨레 문화센터 다큐멘터리 촬영반에 등록을 해서 다녔어요. 거기서 처녀작을 내라고 하는데, 내 사건을 내 스스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희극 속의 비극, 비극 속의 희극’을 좋아해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물려서 풀리지 않는 느낌의 영상물을 좋아합니다. 정권이 바뀌자 갑자기 ‘불온서적’이라는 게 등장했다는 건, 희극이잖아요. 옛날 기준으로 이야기하더라도 전혀 금서가 아닌 것들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실소를 보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이면에 깔려있는 것들을 보십시오. 국방부가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친북, 좌파, 반미, 반자본주의, 이런 것들은 군의 장병들에게 안 좋기 때문에 우리가 통제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2년 동안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사상통제를 할 수 있다’고 하는 인식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인 건가요. 그런 비극 속의 희극, 이런 것이 얼마나 웃기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드러내보고 싶었어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는, 참여연대 사람들과  민변 분들이 많은 도움이 되어주셨습니다.


- 왜 ‘다큐멘터리’인가요?

 다큐멘터리는 ‘영상’이지만 픽셔널 필름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사실적인 것들을 강하게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행동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강력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보면서 재밌어 하고 웃지만, 그 속에 있는 어떤 비극이나 문제점을 보게 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는 효과가 크면서 저비용 고효율 구조라는 점이,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 다큐멘터리와 관련한 앞으로의 계획은요?

 다큐멘터리를 통해 불온서적이 어떻게 지정이 되었는지 그 경위를 찾아가보았는데, 굉장히 우스운 결과들이 나왔습니다. 실제로 이화여대에서 한 번 상영을 했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실소를 보내며 재밌어했어요. 작품은 보완을 좀 해야 하고요. 영상의 미학적 측면, 그리고 구성면에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항소심 끝나면 본격적으로 한 번 해볼까 생각중이고, 인권단체에서 연락이 오면 무상으로 나눠드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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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홍구 교수님이 하시던 <군대와 사회>라는 강의를 물려받아서 했습니다. 대한민국 자체가 군사주의에 상당히 지배받고 있는 사회인데, 민간이 군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형식적으로는 국방부 장관이 민간인이니까 민간이 군을 통제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군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죠. ‘천안함 사태’만 봐도 그렇습니다. 민간인들 입장에서는 군에 대한 접근을 하기가 전혀 쉽지가 않으니까, 유명한 전문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일반인들이 목소리에 힘을 못 내고 가장 핵심적인 정보에 접근을 못하고 있잖아요. 어뢰를 맞았든 좌초가 됐든, 민간 전문가가 들어가서 문제가 어떤 데에 있는 건지를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면 아마 이 정도까진 가지 않았을 겁니다. 군의 비밀주의, 그리고 군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흐름, 이런 것들은 자유주의의 군대에는 맞지 않는 거고, 이런 문제에 대한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가르치는 직업이, 잘 맞으시는 것 같나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강의라는 것은 계속 느는 거지, 잘 맞다 안 맞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재미는 있습니다. (웃음) 우리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많이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군대와 우리 사회는 교호적인 면이 굉장히 큰데, 우리가 군대에서 주입되는 일방적인 이데올로기만을 사회에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또 사회가 군대라는 문제를 일방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부분들은 해결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에피소드라면, 군에서 불온서적 경험을 했다는 한 학생이 기억납니다. 리포트를 써내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당시 자기도 언론에 알린다거나 하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못 냈는데, 누군가가 외부에 알리고 군법무관들이 헌법소원을 내니까, 그것이 굉장히 고마웠다고 한 친구가 수강생 중에 있었습니다. 그때 참 기분이 좋았어요.



- 요즘 세태가, 다소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청년들을 양성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세대에 속해계시면서도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으신 것이 조금은 신기한데요.

 IMF 사태 이후의 사회변화의 영향이 크죠. 사람들이 사회문제보다는, 일단 어떻게 먹고 살까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운동을 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아지는 거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책도 읽고 토론하며 고민하는 등 사회운동에 대한 마인드는 늘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게 될 줄은 몰랐어요. 어떤 계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행동에 대한 고민은 군에서 겪었던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행동에 나서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에요. 사회가 정치권력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헌법적인 질서까지 바꿀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 정도까지는 타협이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행동에 나서게 된 거죠.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니구나, 내가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제가 먹고 사는 일과 운동이라는 것을 조화시키고 변호사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대학교에 있는 분들에겐 ‘행동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참여연대라든지 민변이라든지, 아니면 정당 활동이라도, 무엇이든 활동을 좀 하다보면,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어떤 삶을 살 것이고 어떤 사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군대 말투가 몸에 배어있으신 것 같은데, 군에서 나오신지 얼마나 되셨나요? ^^

 아, 제가 군대말투를 쓰나요? 아직 전역한지 1년 반이 안 되었습니다.
군복무는 1년 정도밖에 못 했지만, 제가 모범군인이었기 때문에. (웃음)
빨리 군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 글 / 출판홍보팀 김란아 인턴   



 

2010/07/15 11:01 2010/07/15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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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구지부의 활동




민변 대구지부는 대구·경북 민변 변호사들의 모임으로서 2004년 5월경 창립되어, 현재 7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그동안 회원들의 탈퇴와 신규가입 등을 거쳐 현재 멤버십을 유지하고 있는 회원은 약 21명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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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지부는 매주 월요일 점심모임을 7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모이는 요일은 몇 차례 바뀐 적이 있으나 매주 한 번씩 점심모임은 지속되고 있으며, 평균 5-8명이 꾸준히 참석하여 친목도모와 현안논의 등을 하고 있습니다. 점심모임에는 지역 시민단체 인사나 기타 초청인사를 불러 식사와 대담 등을 통해 지역인사들과의 교류의 장으로 활용되고도 있습니다.

 대구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에는 민변 대구지부 회원들이 주로 참가하고 있는데,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민변의 남호진 변호사, 간사는 서정욱 변호사가 맡고 있습니다. 대구지방변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2009. 11. 23.(월)에는 대구지방변호사회 회관 5층 대회의실에서 ‘청소년범죄와 피해자(청소년)의 인권’을 주제로 인권세미나가 개최되었고, 여기에 민변 대구지부의 박성호 변호사가 주제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송 구조사업으로는 최근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들에 대한 형사재판, 징계처분에 있어 대구경북지역 전교조 간부들에 대한 구조사업이 진행 중에 있고1, 한편 대구죽전초등학교 성폭력 피해학생을 대리하여 국가(시교육감)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진행 중(담당: 송해익, 권영규 변호사)에 있으며(결심, 선고추정), 2009년도 촛불집회와 관련하여 지역에서 기소된 두 명에 대한 변론을 민변 대구지부(서정욱, 박성호 변호사)에서 맡아서 진행한 바 있습니다.
 그 외 한미FTA 관련 시국사건 변론(김철, 박경로 변호사), 앞산터널 저지 대책위사건 변론(김현익 변호사), 베트남 이주여성 살인사건 변론(박경로, 박준혁 변호사), 국가보안법위반(이적표현물소지, 찬양고무 등) 사건 변론(이승익, 박경로, 신성욱 변호사. 진행 중), 용산참사 대구경북대책위원회의 법원 앞 기자회견에 따른 집시법위반 사건 변론, 시국대회 관련 전공노 대경본부장 징계처분에 대한 소청심사와 소송(각 구인호 변호사) 변론 등을 수행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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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 시민단체 등과의 연대활동도 꾸준히 수행하고 있는데, 대구 시민단체 연대회의에 참가단체로 가입되어 있고, 기타 현안에 따른 대책위에 가입하여 재정적 또는 법률적 조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대구지역 전문직 인권단체와 합동산행대회(2010. 3. 28. 경주 남산)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 행사에는 민변대구지부, 대경인의협, 대경민교협, 건약, 건치, 영대로스쿨생 등 40여명이 참석해 지역사업에 대한 결의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회원행사로는 2009년도 송년행사로 장사익 대구공연(‘꽃구경’)을 관람 했고(2009. 12. 29. 영남대 천마아트센터), 번개 영화관람 행사를 열기도 하였습니다[2010. 4. 7. 수. 18:50 동성아트홀. 경계도시2(송두율 교수 다큐)]. 한편 대구지역 소장언론인과의 만남을 통해 즐거운 시간을 가졌고(2010. 3. 4. 강촌식당), 2010. 6. 25.에는 대구지부 회원가족들과 함께 문경 한성연수원에서 1박 2일 가족야유회를 개최해 회원과 가족들의 유대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지방 소재 민변지부와의 유대를 도모하고자 민변 부산지부와는 3년째 연합산행모임을 개최하고 있고, 올해 5. 15.에는 작년 지리산 삼도봉 등반에 이어 민변 광주지부 초청으로 부산, 광주, 대구지부 회원들이 함께 광주 5. 18. 묘역을 참배하고 무등산 산행을 함께 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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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구지부는
선배 민변회원 변호사들이 꾸준히 멘토역할을 수행해 주면서 후배 민변회원들과의 유대를 강화해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 선후배간의 좀 더 친밀한 교감을 통해 변호사로서, 민변회원으로서, 지역의 깨어있는 시민단체로서의 역할을
더욱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노력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 중입니다.





 - 글 / 구인호 변호사    





 


+ 대구지부의 발족과 구성현황 등 +


 민변 대구지부는 대구·경북 민변 변호사들의 모임으로서 2004년 5월경 창립되어, 현재 7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그동안 회원들의 탈퇴와 신규가입 등을 거쳐 현재 멤버십을 유지하고 있는 회원은 약 21명 정도이며, 여기에는 특별회원인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가신 박선아 변호사(32기, 이하 ‘님’자 생략)와 와병 중인 손영준 변호사(30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원들은 법무법인 삼일의 김준곤(20기), 최봉태(21기), 송해익 변호사(21기)가 개업시부터 민변회원에 가입해 계셨고, 그 후 법무법인 대구하나로의 성상희 변호사(27기) 이렇게 4명이 척박한 대구지역에서 민변대구지부 발족 이전까지 민변회원이라는 자부심으로 지역의 시국사건과 시민사회의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해 오셨고, 2004년도 33기 3명이 민변에 가입하면서 대구지부를 발족하게 되었는데, 당시 성상희 변호사와 같이 준민변회원처럼 활동해 오신 법무법인 대구하나로의 정재형, 남호진 변호사(각 27기)도 공식적으로 민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지부장은 초대 최봉태 변호사 이후로 2대 권오상 변호사(16기), 3대 송해익 변호사, 4대 성상희 변호사를 거쳐 5대 정재형 변호사가 2010. 9.부터 지부장 소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무국장은 초대 정재형, 2대 남호진, 3대 이호철, 4대 구인호 변호사를 거쳐 정재형 지부장 체제에서는 이승익 변호사가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한 때 반상근 간사(여태희, 법학과 대학원생)가 있었으나, 간사의 사정과 지부 재정여건 등을 고려하여 성상희 지부장 시절부터는 간사없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외 회원들로는 성상희 지부장 아래에서 사무차장을 맡고 있는 권영규 변호사, 정재형 지부장과 일할 새 사무차장 신성욱 변호사, 대구시 복지옴부즈만을 겸하고 있는 김현익 변호사를 비롯해, 김 철, 권미혜, 박경로, 박성호, 김영심, 서정욱 변호사 등이 활동하고 있고, 구미시에 있는 관계로 자주 못 뵙는 중국 전문가이신 김희철 변호사와 성기섭 변호사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습니다.

 그동안 박준혁, 김철홍, 이호철 변호사 등이 개인사정상 민변을 탈회한 바 있습니다.


  1. 경북지부 간부 4명(성상희 변호사), 대구지부 간부 3명(구인호 변호사), 대구지역 전교조 간부들에 대해서는 유죄판결(지부장 벌금 100만원, 수석부지부장, 사무처장 각 벌금 50만원)이 2010. 7. 8. 선고되어 항소하였고, 징계처분(지부장 해임, 나머지 간부 정직 2월)에 대해서는 현재 행정소송 계속 중 [Back]
2010/07/14 17:07 2010/07/14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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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대방 철거촌, 대학 2학년 때 처음 그곳을 방문했다.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일사랑’ 학회의 회원으로서였다.
여름방학 내내 학회원들과 함께 막노동을 해 자금을 마련한 후의 방문이었다. 민중의 삶을 체험해야한다는 미명아래 갔지만 그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지속적인 ‘일상연대’였다.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역주민으로 착각할 정도로 신대방 철거촌은 민병덕 변호사의 일부가 되었다.


 그 후로 20년, 민병덕 변호사는 여전히 철거촌의 체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철거촌에서 만난 동료 대학생과 연애하고, 결혼했다. 재개발·재건축 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대방에서 배운 ‘연대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촛불시위에 참여했다가 기소된 시민들을 변호하는데 힘쓰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최근 촛불시위 관련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낸 민병덕 변호사를 만나 재판과 민변 활동, 대학 시절부터 이어진 재개발·재건축이라는 그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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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와 관련해 대법원 일반교통방해죄 무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 내기까지 긴 여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소회를 부탁드립니다.


 촛불집회와 관련해 일반 집회 참가자들에게 가장 많이 적용된 죄목이 일반교통방해죄입니다. 도로상에서 개최되는 집회에 참가하여 ‘육로 등을 손괴 또는 불통하게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교통을 방해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의 피고인은 촛불집회 때, 경찰이 불법주차 중인 방송차량과 무대차량을 견인하려고 시도하자 이를 막던 대책회의 회원 등 50여명에 합세해 견인업무를 방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대한문 인근차로에서의 차량 소통을 방해하고, 교통질서 유지를 위해 차량을 견인하는 경찰관의 직무집행을 방해했다는 내용으로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일반교통방해 부분은 무죄를 받으면서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습니다.


 그간 집시법 위반 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들이 꽤 있는데, 대체로 법리보다는 철저히 사실 관계를 파고들었기에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피고인은 대한문 쪽 차로를 불통하게 했다는 이유로 기소됐는데, 체포된 곳은 건너편인 서울시청 쪽 차로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울시청 쪽 차로는 차량이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증인을 통해 밝히면서, 서울광장에서 시위를 한 피고인에게 반대편인 대한문 앞의 교통 불통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점, 단지 무대차량의 견인에 항의한 것만으로 교통방해를 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해 무죄 판결을 얻었습니다. 유사 사건들에 있어서도 포기하지 말고 사실관계와 현장을 면밀히 검토하면 억울한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교통방해죄의 ‘기타방법으로 인한 교통방해’ 부분이 불명확한 상황에서,
법 조항의 적용과잉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려는 노력이 다소 결실을 봤다는 점이 이번 판결의 가장 큰 의미인 것 같습니다.

 


- 지금까지 촛불시위와 관련해 시민 35명을 변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꾸준히 시위 관련 사건을 맡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는 아이들을 목말 태우고 가족 전부가 갔었는데, 광우병 촛불 집회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몸이 아파서 민변 활동도 잠시 소강상태였고요. 집회에 참여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기에, 대신 촛불 사건 변호 활동을 많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건 변호를 통해 많은 분들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사건 이후 절친한 친구가 된 학원 강사가 있는데, 그 분은 체포 후 3일간 학원에 출근을 못하셔서 해고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셨습니다. 목사님을 변호하기도 했는데, 신앙인이셔서 그런지 법정에서도 무척 당당하시고 말씀을 잘 하시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현재 1심 선고를 기다리고 있는 사건입니다. 경북 구미에 살고계신 분이 피고인인데, 이 분은 허리 통증 때문에 일을 못하셔서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고계십니다. 피고인은 집회를 구경만하고 있었던 자신이 어떻게 일반교통방해, 공무집행방해를 저질렀냐며 기소된 범행 내용을 계속해서 부인하셨습니다. 법정에서는 당시 체포의경 등을 모두 증인으로 불렀지만, 명확한 입증이 되지 않자 수차례에 걸쳐서 다른 체포자를 찾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기초생활 수급자이신 분이 매번 부담스러운 교통비를 감당하며 구미에서 서울로 상경하셔야 했지요. 증인이 출석하지 않아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허탕을 친 경우도 있었어요. 그렇게 사건 시간 16개월, 횟수기일 8회가 지났습니다. 형사절차에서 피고인이 무죄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상황인 것이죠. 그야말로 모든 것을 놓고, 소송에 집중해야만 겨우 무죄 주장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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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을 통해 촛불시위 사건 변호를 시작하게 되셨는데요,
  민변에 활동은 언제부터 하셨고, 가입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법무법인 ‘한결’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공익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법인이었기에
‘한결’에서 일하게 되었는데요, 공익활동에 관심이 많은 한결 소속의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2005년부터 민변에도 참여하게 됐습니다.



- 민변 민생경제위원회에서 간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민생경제위원회 초창기부터
  활발히  참여하신 것으로 아는데, 앞으로의 활동 목표나 방향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주거문제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민생경제위 부동산팀에서 재개발․재건축 분야에 집중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6.2 지방선거기간에는 10대 공약과제를 정해, 이에 대한 후보들의 생각을 묻고 실천 서약서를 받아내는 일을 했습니다. 선거 후에는 당선자 인수위원회에 공약 이행 약속을 받고, 이를 계속해서 모니터링하는 활동을 할 계획입니다. 


 책 출간 계획도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민생경제위원회 주최로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한 재개발․재건축 연수를 진행했는데요, 강의 내용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100문 100답 형식으로 만들어 출판할 예정입니다. 



- 대학 다닐 때부터 철거를 비롯한 재개발·재건축 분야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저는 대학 때 노동문제를 연구하는 ‘일사랑’이라는 학회의 회원이었습니다. 대학 2학년 여름에, 민중의 삶을 직접 체험해보고자 학회원들 모두가 막노동을 해서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학교 근처의 신대방 철거촌을 방문 장소로 골랐습니다. 방문 후, 철거민들의 실질적 고통을 덜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는데, 그것은 지속적인 일상연대였습니다. 이를 위해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고, 농활과 비슷한 민활을 매년 갔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철거촌에서 만난 분들과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당시 우리가 공부방에서 가르쳤던 아이들이 모임 회장을 맡고 있지요.



- 재개발·재건축 분야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오신 분으로서,
  제2의 용산참사를 막기 위해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재개발 사업은 본래 도시계획의 하나로, 공공성이 확보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조합의 운영은 무척 불투명하고 불건전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공사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자금을 가진 세력이 개발 초기단계부터 조합의 집행부를 장악하고, 조합원 총회의 의결절차마저 무력화시키는 것이 관례화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관청은 이를 조합 내부 사정 정도로만 치부할 뿐, 법에 명시된 어떠한 관리․감독권도 행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요구하는 조합원들과 집행부 사이에 형사고소와 관련 민사소송이 빈번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죠. 이러한 과정에서 ‘낙후된 주거환경 개선’, ‘도심의 기능회복’을 목적으로 시행됐던 도심 재개발 사업은 오히려 기존의 공동체를 훼손하고, 그 구성원들을 쫓아내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습니다. 저는 공동체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업이 오히려 공동체를 심하게 훼손하는 현상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러한 공동체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심 재개발에 따른 보상은 원주민의 재정착과 상가 세입자들의 계속적 영업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세입자들에 대한 충분한 이주대책을 수립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광역, 순환 재개발 방식의 개발이 이뤄져야 합니다. 개발 현장에서의 인권 유린에 대한 철저한 대응 역시 필요합니다. 이는 사회 성숙의 정도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는데요, 정치학 개론서 정치의 개념을 ‘한 사회에서 희소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합니다. 누구나 원하는 가치가 희소하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정치인데, 우리 사회는 갈등해소를 위한 다양한 매커니즘을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 사이버죄, 용역 문제 등 관심 분야가 다양하신 것 같습니다.
  최근 변호사님의 화두와 관심분야는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최근 저의 관심사는 ‘아파트 공동체 복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아파트 주거 비율이 엄청난데요, 아파트 건축부터 입주, 관리 단계까지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마을 공동체 문화가 이제는 아파트에서 발휘되어야하는데, 아파트가 공동체 붕괴의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입주민간 이해관계를 조절하는 법률이 명확하지 않아 입대위에서의 비리가 엄청나게 많기 때문입니다. 업체에서 아파트 관련 사업을 수주하려면 관리소장과 입대위 소장에서 뒷돈을 주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업체가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리는 꼭 나중에 들통이 나고, 동네에서 주민들 사이에 소송이 일어납니다. 집합 건물의 탄생부터 지속, 그리고 소멸의 전 단계에 이르는 과정에서, 분쟁이 적절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법제를 개편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견제와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야 원칙적으로 부정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공동육아가 될 만한, 행복한 아파트 공동체를 만드는 지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재개발․재건축, 입대위 구성, 하자소송, 아파트 내부 분쟁 사건 등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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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절차의 이해'를 주제로 은광여고에 법교육 출장강연을 나가시고, 민법 관련 책을 출간하시는 등 일반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계신데요, 이러한 일에 노력하시게 된 이유 등이 궁금합니다.


 저는 법교육 출장 강연 1호 교사인데요, 아이들에게 법이 물이 흐르는 것처럼 너무나 상식적이고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소통을 잘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아이들에게 하는 강의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변호사는 법을 매개로 일반인과 소통하고, 또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우리들만의 용어로는 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해요.


 올봄에는 공인중개사 민법 수험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출판사를 하는 선배가 제안을 해서 집필을 시작하게 됐는데요, 수험생들이 민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반 용어로 친절히 설명하고 싶었어요.

 


- 요즘 월드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분들이 참 많죠,
  민 변호사님도 축구를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축구, 정말로 많이 좋아합니다. 집사람과 연애를 시작할 때, 마라도나 출전 경기를 함께 보면서 제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어요. 축구하다가 다리 세 번, 팔 한 번이 부러지고 인대파열에 연골판 파열까지 겪었어요. 수술을 해서 지금은 재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웃음)


 몇 년 전에는 붉은악마 고문 변호사를 맡았던 적도 있습니다. 제가 일하던 법무법인에 의뢰가 들어왔는데,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제가 맡게 된 것이죠. 오늘도 아이들과 월드컵 경기를 봤어요. 







- 인터뷰 / 출판홍보팀 박초롱 인턴 


 

2010/06/28 14:01 2010/06/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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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시간 코스로 시작한 산행이었다. 처음에는 중간에 쉬기도 했고, 내려올 때면 무릎이 아파 보호대를 차고 스틱을 짚었다. 2007년부터 매주 산에 올랐다. 네 시간, 여섯 시간, 무박산행, 1박2일 종주까지. 몸이 산을 원했고, 산이 몸을 원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몸이 요구해옵니다. 이런 과정에서 느끼는 몸의 변화는 저 혼자 느끼기에는 아까워요.”

 1988년, 창립 멤버로 참여한 민변도 김선수 신임 회장에게는 그동안 ‘산(山)’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아무리 자주 가는 곳에도 뜻밖의 만남”이 있기 때문에, “그 만남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보는 사람마다 권한다”는 곳이 그에게는 바로 산이다.

 김선수 회장은 “사회가 요구는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회원들이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을
임기 동안의 중요한 모토로 삼겠다고 했다. 그 첫 시작이 7월10일에 예정된 전체산행이다.
김선수 회장은 그 날 산악안내인이 되어, 회원들에게 산의 ‘참맛’을 보여 줄 것 같다. 앞으로 그가
산악안내인처럼 노련하고도 여유 있게 이끌어갈 민변이 모습이 어떨지, 김선수 회장을 만나서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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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회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취임 후 2주일 정도가 지났는데요, 어깨가 무거우실 것 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회장 취임 전에도 민변이 생활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크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다만 기자들이 전화하는 횟수가 늘어났죠.(웃음)
 각 위원회나 팀 회의에 참여해 회원들의 활발한 활동을 부탁드리느라, 회의 참여 횟수 또한 늘었습니다.  


- 이명박 정부 후반기에 회장으로서 활동하게 되셨습니다.
  구상하고 계신 활동 목표나 방향성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현 정부이후 민주주의 후퇴가 가시적으로 진행되어서, 고전적 의미의 인권 변론활동을 해야 할 일이 늘었습니다.  물론 고전적인 인권 변론활동은 중요한 일이지만, 소모적인 측면 또한 있습니다. 탄압을 방어하는데 많은 역량이 투입되어서 ‘대안 제시’라는 생산적 활동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안함이나 4대강 사태를 보면서, 제대로 대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는데 이번 지방선거로 그나마 숨통이 트인 것 같습니다. 선거 결과로 정권의 독주가 견제된다면 대안 제시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고 싶습니다.


- 취임사에서 특히 '회원 여러분의 행복'을 강조하셨습니다. 사회 활동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하셨는데요. 첫 시작으로 무엇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저는 1988년에 변호사 개업을 한 이후 상당히 쫓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주로 송무 때문이었고, 민변에서 맡은 일들도 있어서 여가를 즐길 시간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 2005년부터 2년간 사법개혁비서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공무원이 되어 한 가지 업무에만 집중하니까 오히려 시간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 때부터 등산을 시작하고, 책도 열심히 읽고, 미술관에도 다녔습니다. 이러한 여가 활동들을 통해 법률문제만 파고들어서 메말랐던 정서와 빈곤한 교양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야 끝까지 방향성을 잃지 않을 수 있겠다는 깨달음 또한 얻었지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활동일지라도, 일만 계속하면 팍팍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일상생활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회원들은 민변 일을 하는 가운데 행복하겠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좋을 것 같아서 우선 1년에 두 번 전체산행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간 진행했던 야생화 산행과 눈꽃 산행의 반응이 좋았거든요. (웃음)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부모임, 월례회, 가족한마당 등의 행사를 계속하고, 영화나 공연 등을 관람하는 기회도 만들고, 멘토-멘티제도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기타 회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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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견 발표회 때, 사법개혁과 사법감시 활동에 집중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사법개혁비서관 등으로 활동하시며 사법개혁에 힘쓰셨는데요,
  바람직한 사법개혁의 방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현 단계에서 사법개혁의 핵심은 검찰개혁인 것 같습니다. 법원개혁은 미흡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로스쿨제도, 국민참여재판제도, 공판중심주의 강화 등 김영삼 정부 때부터 개혁과제로 논의해왔던 것들을 어느 정도 이뤘습니다. 그러나 검찰개혁은 아직 몇 번의 의제화를 더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검찰개혁을 정부차원에서 의제로 삼은 것은 참여정부가 처음이었는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고비처), 검경수사권조절문제, 수사권-기소권 분리 등의 의제가 현실화되지는 못했지요. 우리나라 검찰처럼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기관이 독점하고, 권력기관화 된 곳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단 비정상적인 구조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폰서 검사 사건을 통해 자체조사로 인한 자정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기 때문에, 고비처 설치 문제가 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민변 내에서 사법개혁을 위한 활동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실 생각이십니까.
  특별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활동하실 계획도 있으신가요.


  일단 사법개혁 문제를 최대한 이슈화 할 계획입니다. 장기적으로는 국민들께 우리 검찰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에 대해 알리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특별 태스크포스팀을 신설할 계획은 없지만, 사법위원회가 중심역량을 검찰개혁 쪽에 투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법위원회는 검찰개혁에 대해서는 고비처 설치를 강하게 요구하는 입장이고, 법원개혁에 관해서는 하급심강화와 법조일원화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현재 정부여당은 법원개혁 문제를 정략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당은 대법관 수를 증원시키려고 하고, 대법원은 고등법원 상고심사부를 만들어 대법관 수 증원만은 막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대법원 상고사건을 줄이기 위한 원칙적인 방안은 하급심을 강화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조일원화가 필요하고요.


- 미국은 지방검사를 주민들이 선출하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교육감도 선거로 뽑았는데 지방검사장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요. 검사들이 정치에 예속되는 이유는 인사권이 대통령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인사가 지방검사장에게 이양된다면 지금처럼 정권의 눈치를 보면서 알아서 코드를 맞추는 일은 많이 개선될 것이라고 봅니다. 지방검사장 주민직선을 오래 전부터 제시했던 분이 민변의 김진욱 변호사인데, 민변 사법위원회도 이를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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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에 '고기 안 먹는 월요일'을 제안하셨고, 채식을 하고 계십니다.
  민변의 여러 회원들을 채식주의자로 이끄시는 것 같습니다. ^^
  채식은 언제부터 시작하셨고, 계기가 무엇입니까.

  제가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도 많지만, 건강검진 결과의 수치를 보면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어요. 그러던 중에 MBC 스페셜 ‘목숨걸고 편식한다’ 편을 봤는데, 한 의사가 채식을 통해 고혈압 환자를 치료하는 사례가 나왔어요. 저도 채식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공부모임에서 <육식의 종말>을 읽으니, 정말 고기를 먹으면 안 되겠더군요. 미국산 쇠고기 파동도 있었고요. 그렇게 해서 채식을 시작한 것이 작년 6월입니다. 특별히 몸이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지만, 2~3년 전에 비해 15kg이 덜 나갑니다. 매주 산에 다니고, 아침에 스트레칭을 하니 10kg 정도가 빠졌고, 채식을 해서 몸무게가 더 줄었어요.


- 민변과 창립 때부터 함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립멤버로 활동하게 되신 계기가 무엇입니까.

  군대에 강제 징집되었다가 제대한 이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습니다. 그 때는 친구들이 대개 노동현장에 많이 있었는데, 변호사를 하면 노동자를 도와줄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지요. 노동변호사로 활동하고자하는 기본적인 방향이 있었기 때문에 연수원을 나와 조영래 변호사님이 소속돼있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법회가 있었고, 젊은 변호사들이 청변을 만드는 문제에 대해 논의를 하다가 표결과정까지 거쳐 정법회와 합쳐 민변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 20년 넘게 노동전문 변호사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그간 수많은 노동법개정을 이끄셨는데요,
  최근에 관심을 갖고 계신 노동 관련 화두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지금 철도노조 파업사건을 맡고 있습니다. 철도노조 파업은 공장을 점거하거나 출근하는 비노조원들을 막는 것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졌어요. 하지만 노조원들은 ‘업무방해죄’로 기소가 되었죠. 단순히 출근을 하지 않거나, 집단적으로 근무하지 않는 파업형태는 적극적으로 회사 업무를 방해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정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업무방해죄를 적용해 형사처벌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 근로자들이 집단적으로 노무를 거부한 것을 ‘위력 행사’라고 봤는데, 이것이 어떻게 위력이 될 수 있습니까. 헌법에는 노동자의 기본권으로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파업 시 회사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내포되어있는데, 헌법상 단체행동권을 보장한 것은 파업을 범죄행위로 취급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UN이나 ILO에서 우리나라에 업무방해죄에 대한 문제제기와 개정 권고를 하고 있는데 무시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 22년동안 '민변'이라는 단체의 변화상을 이끄셨고 또 지켜보셨습니다.
  촛불시위를 계기로 시민사회와의 연결성이 더 강해졌는데요,
  앞으로 민변이 나아가야 할 방향, 시민사회에서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영삼 정부 때까지만 해도 민변은 고전적 인권 변론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김대중 정부와 참여정부를 들어서는 이러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문제들이 제기되었지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면 채택될 여지 또한 있었고요. 그래서 민변 또한 사회 각 분야의 대안 제시를 강화하는 방향의 활동을 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또다시 고전적 인권 변론의 수요가 늘었습니다. 특히 탄압의 방법이 대규모화되고 시민들의 일상적인 표현까지 탄압이 되니, 민변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서 현장에 밀착해서 활동했습니다. 앞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법률가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민사회와의 접촉면을 늘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인권과 민주주의는 무한하기 때문에 민변의 역할은 무한하다고 생각합니다.


- 등산을 좋아하시는데요, 최근 다녀오신 산행지가 궁금합니다. 추천할만한 등산코스가 있다면요.

  저는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대모산 등산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후에는 청계산에 자주 갔지요.
  가까이에 있는 낮은 산부터 시작해서, 2시간 코스, 4시간 코스로 늘려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는 소백산에 다녀왔고, 그 전에는 덕유산 종주를 했어요. 이번에 많은 회원들이 7월10일 대덕산 산행에 함께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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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 이동화 간사, 김란아&박초롱 인턴

  글  /  박초롱 인턴
사진 / 김란아 인턴


 

2010/06/14 16:25 2010/06/1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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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23차년도 총회, 나와 민변을 이어주는 튼튼한 동아줄”

 




1. 출발


 2010년 5월 29일 아침, 전날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와 달리 뚜렷한 햇살과 청명한 하늘은 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오전 9시 30분, 서초동 정곡빌딩 앞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한 대와 벌써 와 기다리는 여러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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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내가 아는 회원보다는 모르는 회원이 많았다. 이름을 알리며 인사를 하고 출발시각인 10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정각 10시가 되어 오기한 한 모든 사람이 도착했고 총회장소인 충주건설경영연수원으로 출발했다. 처음이란다, 함께 출발하기로 한 사람들이 정시에 모인 것이 말이다. 23차년도를 잘 열어갈 좋은 징조이리라.    

 버스에서 지난번 신입회원 엠티에서 밤새 얘기를 나눴던 서선영 변호사의 옆자리에 앉았다. 서 변호사는 전날 살짝 마신 술 때문에 조용히 숙면을 취했고, 난 처음 참가하는 민변 총회를 미리 상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 또한 잠시 잤는지도 모르겠다. 한택근 사무총장(이제는 전 사무총장)이 짧게 총회일정을 소개하고, 송상교 변호사가 좀 더 자세하게 일정을 소개했다. 두 변호사 모두 말에 위트가 묻어났다. 마이크 좀 잡아본 분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충주 건설경영연수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배나무 가든’이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아 또 새로운 분들과 인사를 하고 담소를 나눴다. 내 맞은편에 한 여자 변호사가 앉았는데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목소리가 크고 또랑또랑했다. 정연순 변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때는 이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총회자리와 회원단결의 밤에 그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가 여장부라는 것을. 황희석 변호사와 그 외 몇 분하고도 인사를 나눴다.



2. 사전행사



 도착 예정시간인 1시 30분보다 조금 일찍 충주건설경영연수원에 도착했다. 충주건설경영연수원은 풍광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고, 시설도 깔끔했다. 무엇보다 푸른 잔디구장이 마음에 들었다. 임시로 방을 배정받고 그 곳에 가지고 온 짐을 내려놓았다. 김광수경제연구소 소장의 강연이 있는 오후 4시까지 자유시간이란다. 사무처에서는 공 찰 사람, 산책할 사람, 책 볼 사람, 잠 잘 사람, 원하는 대로 약 2시간의 시간을 보내라고 했다. 난 공 찰 사람이었다. 챙겨온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아까 눈여겨 본 잔디구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두 분씩 모이더니 한 20명되는 사람들이 잔디구장 주변에 모였다. 그 중 절반인 10명은 반씩 팀을 나눠 족구를 했고, 나머지 10명은 또 5명씩 팀을 나눠 축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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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 얘기는 잠시 해야겠다. 족구를 하던 사람들 10명과 축구를 하던 사람들 10명이 서로 상대가 되어 한 판 승부를 겨루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무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을 때 인사를 나눴던 황희석 변호사는 축구선수라 할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다. 드리블, 패스, 슛 모두 좋았다. 나중에  황 변호사가 ‘세계변호사축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터키로 출국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는 귀국하였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분 한택근 변호사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내일 모레 쉰이라는 분이 스피드, 지구력, 골 결정력을 모두 갖췄다. 젊은 세대로는 이동화 간사가 눈에 띄었다. 덩치에 비해 날렵하고 덩치대로 힘이 넘치는 킥력으로 멋진 골을 보여 주었다. 이 분들 뿐만 아니라 모두 사력을 다해 뛰었고 멋진 플레이가 속출했으면 경기가 끝났을 때 우린 하나였다. 다만 모 변호사가 근육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쾌유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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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4시, 특강 강사인 김광수 소장이 왔다.
‘한국 경제의 현황과 전망’이 강연 주제였다.
김 소장은 자신의 경제연구소에서 열심히 뽑아낸
경제지표로 한국경제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열연하였다.
김 소장은 벌써 10여 년을 민간경제연구소를 운영하며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부동산 문제, 4대강 사업문제,
정부의 재정정책, 복지정책 등등에 관해 재미난 얘기를
많이 해주었다. 강연 후 몇몇 회원은 김 소장에게
문제의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 날카롭게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김 소장의 답변도 있었다.
예정기간을 넘기면서 질문과 답변이 오갔는데,
경제에 관해 일천한 지식밖에 없는 나로서는
그 내용을 다 옮길 수 없어 아쉽다.




3. 총회



 저녁 6시 쯤 건설경영연수원 본관 1층 구내 식당에서 다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특색없는 식단이었지만 운동하고 강연 듣느라 지친 나에게는 꿀맛과 같았다. 식당에서 반가운 얼굴 하나를 만났다. 친하게 지낸 대학교 선배인데 한 7~8년 만에 만나니 반갑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선배는 아이 둘을 가진 아이엄마이고, 남편이 민변 회원이었다. 곁에 있던 선배의 남편인 서상범 변호사와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예정대로 저녁 7시경에 건설경영연수원 1층 강당에서 총회를 시작하였다. 총회 의장으로 백승헌 회장이 자리를 하였고, 진행은 한택근 사무총장이 맡았다. 성원보고를 시작으로 총회 성립을 알리고 보고안건부터 논의안건까지 차례로 진행되었다. 민변 역사에서 전무했던 연임으로 두 번째 2년 임기의 막바지에 있던 두 분은 총회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하였다. 그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행을 도운 것은 사무처가 각고의 노력 끝에 펴낸 500쪽 가량의 총회 자료집이었다. 특히 총회자료집에는 안건에 따른 세심한 목차와 연결 페이지 안내가 있었는데 사무처 간부들의 정성이 가득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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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이번 총회에 처음 도입하였다는 PPT는 약간의 어긋남이 있었지만 민변의 이모저모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총회 전반부에는 참석한 대전, 대구, 광주, 부산 등 지역민변 회원의 인사, 각 위원회 별 모범회원 포상, 가입 20년을 맞은 회원에 대한 감사패 전달, 신입회원 인사가 있었다. 민변과 17년을 함께한 정은경 간사가 육아를 이유로 그만두게 되어 그 동안의 소회와 아쉬움을 말할 때에는 총회 참석자들 모두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논의안건 가운데 회칙개정의 건까지 논의한 후 이번 총회에서 제일 중요한 새 회장단 및 집행부를 선출하는 안건이 시작되었다. 절차에 따라 백승헌 회장이 의장 자리에서 내려오고 민변 회장 선거관리위원장인 정미화 변호사가 나와 경과보고를 하고 선거결과를 발표하였다. 김선수 변호사를 회장으로 이원재, 배삼희 변호사를 각 감사로 하는 한 팀이 단독 출마하였고, 투표는 총회 전에 우편투표가 이뤄졌으며 집계도 이미 총회 전에 끝난 상태였다. 정확한 투표인원와 투표율은 기억나지 않지만 전체 투표자 가운데 반대표는 4표 밖에 되지 않았다. 감사에 대한 반대표는 3표였다. 선거관리위원장은 적법하게 새 회장과 감사가 선출되었음을 선포했다.
 사실 총회 전에 이미 언론에서는 새 회장이 누구인지 발표를 한 상황이었다. 김선수 새 회장은 내심 걱정했는데 이제 언론 발표대로 당선이 돼서 한시름 놓았다고 짐짓 너스레를 보이셨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당선 수락의 인사말을 차분히 읽어 나갔다.  현 정부의 역사후퇴 행위에 맞선 단호히 싸울 것이며 한편 회원들이 행복한 민변을 만들겠다는 각오가 들어 있었다. 민변의 새 회장으로 더 좋은 세상을 일구기 위해 애쓰겠다는 진심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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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정연순 변호사가 사무총장으로 선임되고 김칠준, 민경한, 이찬진, 최은순 변호사가 부회장으로, 황희석, 이재정, 이광철 변호사가 비상근 사무차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분의 인사가 있었고, 줄지어 상근 차무차장, 각 위원회 위원장들이 소개말과 함께 포부를 얘기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23차년도 사업계획과 예산안에 대한 대한 각 승인안건은 정연순 새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논의가 되었다. 준비를 많이 하셨는지 방대한 사업계획과 예산안에 대해 깔끔하게 설명하고 회원들의 승인을 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였다. 새 사업계획안과 예산안은 만장일치를 의미하는 박수로 통과되었다.

 회원들의 몇 가지 제안요청이 있었고 각 제안에 대해 새 집행부가 논의 후 처리하는 것으로 하고 저녁 10시 쯤 총회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기념 촬영, 적극적으로 총회에 참석했던 회원들은 활짝 웃으며 기념 촬영을 하였다.



4. 회원 단결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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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경영연수원 한 켠에 있는 야외 공연장에 탁자와 의자가 놓이고 바비큐 고기가 익어 갔다. 사무처에서 준비한 수박, 사과, 바나나 등 과일과 오징어, 땅콩 등 안주가 가득했다. 소주, 맥주, 막걸리, 음료수도 차가운 아이스박스에 잘 담겨 있었다. 참석한 회원들끼리 술을 나눠 마시면 친해지는 시간인 것이다. 물론 술을 먹지 못해 물을 마시는 회원도 있었지만 술이냐 물이야가 중요한 것은 당연 아니다.  

 회원 단결의 밤을 위해 류신환 변호사가 등장했다. 서초동에서 출발 전에 인사를 나눴는데 송상교 변호사로부터 민변이 자랑하는 명진행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정다감한 스타일의 진행 솜씨가 인상적이었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류 변호사의 사회로 그간 고생한 백승헌 회장, 한택근 사무총장에 대한 헌사 있고 사무처에서 마련한 감사선물 전달도 있었다. 4년 동안 참 힘든 일이 많았으리라. 백 회장, 한 사무총장이 그 동안의 소회를 말하는 시간이 있었고, 다른 회원들이 그 동안 묻지 못했던 (예컨대 회장과 사무총장이 다툰적은 없는지 하는) 질문도 이어졌다. 이 질문시간은 류 변호사의 야심찬 기획이었고 참석자들의 호응도 대단했다. 그리고 박연철 변호사 등 선배 회원들의 후배 회원에 대한 따뜻한 격려의 말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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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선수 회장과 정연순 사무총장이 여러 테이블을 돌며 인사를 하고 술잔을 함께 기울였다. 그리고 술이 돌자 여기저기서 이야기 꽃이 피었고, 종국에는 노래가 터져 나왔다. 다들 흥이 나는지 내내 그 자리를 만끽하는 듯 했다. 원래 술자리를 잘 자르지 못하고 끝까지 남아 있는 편인 나는 이 날도 끝까지 남아 여러 선배 회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즐겁게 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다 보니 일하며 쌓인 스트레스도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송상교 변호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하게 되었고 아침이 가까워서야 잠이 들었다. 



5. 마치며 


 다음 날 오전 10시 20분 쯤 미리 숙소를 떠난 회원들과 숙소에 남아 하고픈 일을 하는 회원들을 빼고 모두 버스에 올랐다. 버스로 이동한 후 충주 중앙탑을 보고 와인 박물관에 들러 술의 역사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술의 역사는 좀 알게 되었지만 아 전날 아니 새벽까지 먹은 술로 인해 몸이 몹시 괴로웠다.

 낮 12시 쯤 와인 박물관 그 근처 손두부집에서 그 날 마지막 행사인 점심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 자다보니 어느덧 교대역 앞이었다.

 민변총회에 참석해 보니 민변의 규모를 알 것 같았고, 전국 각지에서 민변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선배 변호사들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민변활동의 깊이와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민변에 가입했음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던 민변에 대한 어색함이 사라졌다. 비로소 민변의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 23차년도 민변총회는 좋은 추억이자, 나와 민변을 이어주는 튼튼한 동아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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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  백주선 변호사  




2010/06/14 13:30 2010/06/1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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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차 민변 총회를 끝으로,
4년동안 민변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너무너무 수고가 많으셨던
백승헌 변호사님과 한택근 변호사님,
그리고 민변의 산 역사와도 같았던 정은경 간사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세 분의 새로운 계획과 앞으로의 삶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아래의 사진은 세 분에 대한 민변 상근자들의 마음의 선물입니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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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17:52 2010/06/0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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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변은 5월 29-30일 제23차 정기총회를 갖고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한다.
동시에 백승헌 회장을 비롯한 현 집행부의 임기는 마무리 된다.
시작과 마무리, 두 가지를 맞이하는 민변 집행부와 사무처는 최근 정신없이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백승헌 회장을 만난 날은 그의 임기 만료 닷새를 앞둔 날이었다. 4년 간 민변 회장을 맡아온 터라
할 이야기가 무척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백 회장은 민변의 22년 역사를 지켜온 창립 멤버이다.
1988년 창립당시 51명이었던 회원은 현재 637명으로 늘어났다.
스물다섯 살의 신참 변호사였던 백 회장은 민변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촛불시위 등 민변이 맞닥뜨렸던 굵직한 사건과 변호사로서의 활동에 대한 소회를 듣고자 했다.
그러나 ‘퇴임사’같은 내용으로 이끌고자 준비한 인터뷰는 첫 질문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백승헌 회장은 그간의 소회에 대해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했다.
또 아직 임기가 닷새 남은 만큼 소회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니 “남은 시간에는 앞만 보겠다”고 했다.

 뒤를 돌아보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고, 앞을 바라보는데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고
백 회장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가 쐐기를 박았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분통이 터져요. 내가 아직 청년인데!”
인생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특유의 시원한 너털웃음이 뒤따랐다. 임기를 마친 백승헌 회장은 민변의 일반 회원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향후 활동이 더 기대되는 것은 그가 ‘청년’이자 청년 정신을 한 몸 가득 안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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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 멤버로 민변 활동을 시작하셨고, 1996~1998년 사무국장, 2003~2006년 부회장, 2006년부터 현재까지 회장을 맡으셨습니다. 민변이라는 단체의 변화상을 직접 겪어오셨는데요, 민변이 사회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한 생각을 말씀해주십시오.

 민변의 역할은 크게 시민사회단체, 변호사단체, 전문가단체, 인권단체의 네 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네 가지 역할이 상호 긴장 속에 서로를 보완하면서 지켜져 왔고, 민변에 대한 평가에도 네 가지 시각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일반 사회가 변호사를 익숙한 존재로 받아들이지만, 민변 창립 당시 변호사 집단은 폐쇄적이고 특권적이라고 규정되곤 했습니다. 제가 개업할 당시인 86년에, 서울지방변호사 등록수가 670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민변이 다른 변호사 단체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이고 시민사회와 소통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의식을 가진 결과, 촛불시위 과정에서 시민과 소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사회단체로서의 역할을 견지하는 동시에 ‘인권을 말하는 변호사 단체’라는 기존의 성격이 강화되어야지 민변이 더 충실해질 것 같습니다. 


- 연임하셔서 총 4년간 회장직을 맡으셨습니다.

 제가 무능해서 2년 동안 할 일을 4년에 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96년부터 2000년까지 연임하신 최영도 변호사께 누가 되는 발언이라 안 되겠군요.(웃음) 전임회장이 잘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유능한 신임회장을 모셔야 하는데, 지난번에는 그것에 실패했습니다. 재취임 할 때 “2년 후에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이번에는 회장 후보를 모시게 되어 다행입니다.


- 취임하실 때 재임기간의 목표로 제시하신 것이,
  1) 초심을 잃지 않는 민변 2) 대안제시기능의 강화
  3) 대규모 단체로서의 내적 질서 수립  4) 다가가는 민변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평가하십니까?

 
‘초심을 잃지 않는 민변’은 '운동성의 유지'를 말합니다.
조직이 오래되면 정체되거나 타협하기 쉽기에, 초기의 건강한 운동성을 유지하자는 뜻으로 제시한 목표였습니다.
 ‘대안제시 기능의 강화’는 민변의 발전을 전제로 한 겁니다. 탄압에 방어하는 동시에, 새로이 구성될 사회질서에 적극적인 의견 제시를 하자는 말입니다. 지금과 같은 역행 국면에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방어만 하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역행국면이 끝나면 언젠가는, 그 방어의 역량이 민변이 가진 가치관을 펼칠 수 있는 준비로 이어져야 할 것이라는 측면에서, 계속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규모 단체로서의 내적 질서 수립’은 상근 변호사제의 도입으로 발전의 토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요.
 ‘다가가는 민변’은 시민사회에의 개방성을 뜻합니다.

 평가에 관해서라면, 다른 분들의 평가는 달게 듣겠지만, 저 스스로는 아직 평가를 보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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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정부 당시 방금 말씀하신 것과 같은 비전을 가지고 취임하셨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상황의 변화와 함께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셨는지요.  

 
이명박 정부의 출범은 민변에 ‘외적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서 받은 외적 충격은 민변을 각성시키고 스스로를 성찰하게 한 것 같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사회 연대활동을 지금처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참여정부에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면서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동시에 발생했죠. 권력에의 동참이 꼭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는 NGO로서의 민변에 일종의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도전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나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삼성특검이나 한미 FTA 문제 등에서 볼 수 있듯,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적극적으로 다퉈나가는 구별의 정신을 기본적으로는 세웠다고 판단합니다.


- 민변에서는 촛불집회 2주년을 맞아 <민변 촛불백서>를 발간했는데요,
  촛불 시위와 민변의 역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반론의 여지없이, 제 재임기간 중 가장 큰 사건이었습니다. 지난 4년간의 사회 변동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사건일 것이고요.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시민사회가 민변에 의탁하고 활동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민변 회원들이 촛불 집회 당시 민변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부심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촛불은 완결된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분히 반추하면서 제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도 촛불을 소화해야하고, 민변도 소화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 민변은 시민사회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지만, 회원 단체이기도 합니다. ‘공부모임’을 만드는 등
 對 회원 사업에 신경을 쓰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질문자께서 신경 썼다고 평가를 해주신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신경을 쓴 것에 비해 가시적 성과가 뚜렷하지는 않습니다. 집행부로서는 항상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원들이 어렵게 가입하고, 적지 않은 회비와 시간을 내주심에도 불구하고, 민변이 얼마나 회원들에게 다가갔는가의 여부는 아직 진행형입니다. 발전의 여지가 많고, 또 발전해야하는 부분이죠. 민변은 공공의 가치관을 기초로 한 단체인 만큼, 다른 단체들보다도 회원들 사이의 연대감이 강해야 합니다. 집행부는 그 매개가 되어야 하고요. 변호사 개업 여건의 변화와 변호사의 수적 팽창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연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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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세에 변호사 개업을 하신 후,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대학 4학년 때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개업이 이른 편입니다. 연수원 생활을 하면서, 판사나 검사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변호사가 적성에 맞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무실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큰 고민이었지만, 개업 변호사를 선택한 덕분에 민변 활동을 할 수 있게 됐지요.


- 민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법회 회원으로 활동하시다가 1986년 민변 창립을 함께 하셨습니다.
  민변 창립에 관여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는 시대적 당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에 대학에 입학했는데, 3개월 남짓 대학 1학년 생활을 하고난 나머지는 다 휴교 상태였습니다. 80년대에 학생문화를 겪은 데다가, 변호사 개업을 한 86년까지도 연장선상의 정권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에게는 큰 고민 없는 자연스러운 경로였습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고 나서 얼마 후에 87년도에 6월 항쟁을 겪었습니다. 정법회 선배들이 변호사협회 건물에서 농성을 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저도 찾아갔습니다. 정법회 활동은 민변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함께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선배 변호사들이 제게 시국 사건을 맡아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변호사가 적은 반면 시국 사건 수는 무척 많았어요. 학생 시위사건, 조직 사건, 각 노동 사업장에서 양산된 사건들이 줄을 이었고, 이를 변론하기 시작했습니다. 민가협에서 세어봤더니 제가 시국 사건을 가장 많이 맡고 있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젊다고 표현하기보다 ‘어리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았던 저에게, 사건을 위임하신 분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중요한 일을 맡기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요. 지식이 짧고 경험이 없어, 지금 입장에서 보면 부족하고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것들이 아직도 가슴에 부담으로 남아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경력이 꽤 쌓인 변호사가 된 지금도 가끔 그 때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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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세에 개업하신 이후로 쉼 없이 달려오셨습니다, 꾸준히 사회 운동을 하도록 만든 동력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시대적 당위, 그리고 더 열심히 운동하고 고생하시는 분들에 대한 채무감이 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부인이신 정연순 변호사도 민변 회원이시고, 사회 활동 또한 활발히 하고 계십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

 
제가 변호사 개업을 하고 있을 때 옆방에 시보로 와서 알게 된 사이입니다. 정연순 변호사가 시보를 끝낼 무렵에 데이트를 시작했지요. 나중에는 저와 같은 사무실에 취업하게 되었고요. 결혼 16년째인데 연애 이야기를 하려니 아득하네요.(웃음)

 정연순 변호사는 학생 운동을 했었고, 변호사를 지망한 이유도 민변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것도 연애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제가 다섯 학번 위이고 연수원 기수도 더 위인 선배 변호사라, 대부분은 제가 정 변호사에게 도움을 줬다고들 생각하는데, 역으로, 저는 제가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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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백승헌 변호사와 정연순 변호사는 사무소를 같이 쓰고 있다. 함께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잠깐 가질 수 있었다.]  


- 자녀들과 대화를 많이 하시는 편이신가요.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아이들이 한창 사춘기입니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다들 그러하듯이, 대화를 많이 하려 하지만 부족하다고 느껴요. 요즘엔 내가 사춘기 때 어땠는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자신만의 세계 독자적으로 구축해서 그에 따라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 회장직에 재임하셨던 동안을 한 번 돌아봤으면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가장 아쉬웠던 일 등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이제 닷새 남았는데, 남은 기간에는 앞만 보려고요. 소회는 천천히 해야 할 일 같습니다. 다 끝나고 나서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민변 회장 4년과 함께 만 25년 동안 변호사를 했기 때문에 한 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 차기 집행부에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독자적인 색깔을 가지고, 나아가시면 될 겁니다. 그 이상의 드릴 말씀은 없어요.


- 인생의 선배로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아주 분통이 터져요. 내가 아직 청년인데!!(웃음) 저 스스로에게 말한다면, 기본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녹일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청년들도 그런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앞에서 말한 것과 똑같이, 닷새 후에 생각해보겠습니다.


 



 - 인터뷰 / 홍보출판팀  이재정 변호사, 김란아·박초롱  인턴
- 정리 / 홍보출판팀 박초롱 인턴
                                    



2010/05/27 19:21 2010/05/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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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만남과 희망의 장, 2010 민변 총회를 기대합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로서의 길에 막 들어선 지도 벌써 몇 개월이 되어 가지만,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실수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신입회원입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민변 모임에 가끔씩이라도 얼굴비추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항상 민변에 대한 미안함과 저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어느 조직이든지간에 ‘총회’라는 행사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고, 특히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되는 경우 그 조직의 향후 운영기조가 정해지기에 신입회원으로서 이번 민변 총회만큼은 빠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모자랐던 잠이나 실컷 잘까 하는 유혹도 뿌리치고 2010 민변총회에 참석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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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민변에 대해서는 예전에 대학생 때부터 익히 들어왔고, 항상 저의 시선을 끄는 단체였습니다. 때로는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신문 한쪽 귀퉁이에도 잘 나오지 않다가도, 때로는 역사의 현장에서 사회적 주목을 받던 민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언젠가 나도 그 공간에서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민변의 구성원이 되었고 총회에 참석하여 향후 4년간 민변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합니다. 자꾸만 신문기사와 텔레비전 뉴스에 눈길이 가게 되는 요즘, 민변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떠한지, 이후에 민변이 그리는 민변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인지, 궁금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진지하지만 유쾌하게 이야기하고 알아갈 수 있는 자리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 민변을 지켜 오셨던 많은 선배님들을 뵙고 좋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전 민변20주년 행사에서 한승헌 변호사님이 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그동안 사서 고생하셨던 분들, 그리고 앞으로 사서 고생하실 분들, 이번 총회에 모두 오실 거죠?
총회에서 반가운 얼굴로 뵙겠습니다.


 


- 글 / 백은성 회원
 
 







2010/05/20 10:13 2010/05/20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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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민변 총회를 회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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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의 글은 민주변론 83호(2009. 7.8월호)에 실린 민변 총회 후기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글을 통해 민변 총회의 모습이 어떠한지 그려보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지난 4월 초순경에 총회준비위원회 위원장 이상호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올해 총회를 경북권에서 진행하기로 하는데 좋은 장소가 있으면 추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보겠다고 하였으나 게으름을 피우다가 한참 뒤에 경북 군위에 있는 간디문화센터에 연락을 하여 물어보니 100명 정도가 회의도 하고 숙식과 뒤풀이를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간디문화센터 대표로 있는 문창식 선생은 대구시민센터 추진위원회 집행위원으로서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자주 보고 있었고, 나는 간디센터에 비정기적 후원도 하고 있었으나 정작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본부와 연락이 되어 본부 상근자들이 현장을 답사하고 장소가 적당하다는 의견을 내어 총준위에서 일단 총회 장소를 확정하는 것으로 연락을 받았다. 이후에는 본부와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았고, 빈틈없는 준비를 위하여 본부에서는 몇 번 간디센터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들었다. 이 과정에서 대구지부의 역할에 대한 본부의 요청이 있었고, 처음에는 장소를 소개하는 정도로 알았는데 조금 지나니 공동개최(?)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공동개최는 아니지만 대구지부에서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일단 대구지부 회원들이 다수 참석해야 한다는 것, 뒤풀이 자리를 만들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는 것, 다음날 필요한 관광 일정을 준비하는 것 정도를 지부의 역할로 인식하였다.

총회가 임박하여 들으니 27일은 간디센터 개소 이래 가장 바쁜 날이었다. 간디문화센터는 원래 간디자유학교가 군위군 소보면 서경리에 위치한 서경초등학교 폐교 자리를 인수하여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학교를 운영하다가 금산으로 이사를 가고 폐교 자리는 문창식 대표와 몇 사람이 함께 인수하여 도농을 연결하는 지역문화센터로 새 단장을 하게 된 시설이다. 이 곳은 농촌 재래장 살리기, 농촌 지역 다문화 가정의 상호소통과 공동체 정착, 어린이들의 공동체 생활 경험 등 다양한 교육 행사를 진행하는 문화공간이다. 더불어 지역 사회단체들의 수련회 등에 숙식을 제공하는 기능까지 하고 있다. 이날 소보 장터 장날 행사가 오전에 있었고, 오후 3시에는 간디센터에 개관하는 음악당 개관기념 음악회가, 오후 4시부터 민변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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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회원들은 지부장, 사무국장과 전 지부장 송해익, 전 사무국장 남호진 회원이 함께 이동하여 3시 정도에 도착하여 음악회 자리에서 느긋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부회원들이 타고 온 버스가 도착하여 간디센터가 분주해졌다. 회의공간에 다수 회원들이 들어가 4시부터 예정된 시국토론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음악회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즐기려고 음악당을 나오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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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토론회에서는 현 정부의 일방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검찰개혁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차후 권력교체를 대비하여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 구축에 대한 정책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토론회를 마치고 간단한 저녁식사, 그리고 부산과 대구지부 회원들이 족구시합을 하였는데 대구가 이긴 것으로 기억된다. 족구 때문에 총회 시작이 약간 늦었는데, 총회 의사는 물 흐르듯이 잘 진행되었다. 예년에 항상 대구지부 회원들이 의사진행이나 의안내용에 대하여 발언을 많이 하여 집행부를 긴장하게, 혹은 피곤하게 하였는데 이날은 손님을 부르는 입장에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강성 분위기(?)를 주도해 온 정재형 변호사가 안식년으로 자리에 빠져서 그런지 대구회원들의 발언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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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면서도 열띤 분위기 속에서 총회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9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이미 간디센터 사람들이 두 개 불판을 깔고 피조개와 가리비를 굽고 있었다. 마산의 명물이고, 내륙인 군위나 대구에서는 싱싱한 조개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100명 가까운 인원이 모여서 아무리 구워내도 조개는 공급이 달리는 모양이었다. 술이 한 순배 돈 다음 간디센터 사람들이 풍물을 들고 나와 한바탕 두드렸다. 밤이 깊어짐에 따라 한두 사람씩 잠자리로 들어가면서 자리가 정리되고 있었다. 원래 캠파이어 목적으로 장작을 쌓아 불을 피웠었는데 조개에 끌린 사람들이 야외 파티장으로 모여들어 캠파이어는 이루어지지 않고 장작은 외롭게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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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숙취로 다음날 조금 무겁게 일어났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사 후 정리를 하고 먼저 서울행 버스를 환송하였다. 본부 회원들은 경북 북부의 명물 부석사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남은 사람들이 각 지부 회원들인데, 전주와 대전 지부 회원들은 먼저 올라가고 방향이 같은 부산과 광주 회원들이 남아 대구회원들과 함께 인근 팔공산 삼존석굴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삼존석굴은 군위가 보유하고 있는 국보의 하나로서 평소에는 보전을 위하여 철문으로 봉쇄하고 있어 두어 차례 방문하였지만 한번도 바로 앞에서 보지 못한 문화재이다. 이날은 정말 운이 좋아 어느 절의 신도달이 단체 참배를 하는 관계로 철문을 열어두고 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아미타 부처님과 좌우 보살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었다. 불교에 조예가 깊은 김현익 변호사는 본부는 역시 아미타부처를 모신 부석사 무량수전을 방문하고, 우리는 제2석굴암을 방문하여 아미타불의 인연이 있다고 한마디 하였다.

제2석굴암을 돌아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한티성지를 지나쳐 팔공산을 군위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한티고개 정상 휴게소에서 차 한 잔을 하였다. 그냥 보내기가 아쉽다는 구인호 사무국장의 강력한 주창으로 휴게소에 들렀던 것이다.

광주, 부산 분들을 모두 보내드리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구에서 약속이 있다고 하여 동행한 서울의 임성택 변호사를 배웅하고 총회 일정을 마쳤다.

수고하신 본부 임원들과 간사들, 대구 회원들, 그리고 도와 준 간디센터 구성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글 / 성상희 회원    


2010/05/19 15:21 2010/05/1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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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민변 신입간사 어중선 입니다.

 민변의 식구가 되자마자, 정신없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에너지정의행동(구 청년환경센터)라는 환경단체에서 3년간 활동가로 일하면서, 피해지역과의 연대, 단체 간의 연대 사업, 대학생모임 등을 통해서 기본적인 시민운동의 활동을 익혀왔습니다.

 작은 규모의 단체이긴 하였지만, 그만큼 상근인력도 적어 다양한 능력을 요구하였습니다. 컴퓨터의 활용 능력이라든지, 급하게 잡힌 기자회견이나 집회, 자료집, 성명서 등 현안대응과 빠른 일처리에 익숙해졌던 것 같습니다. 급박하게 변화하는 환경정책들, 이곳저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새로운 대형 파괴사업들, 일상적인 업무들.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투쟁하며 살아 왔습니다.

 민변에 처음 출근 하던 날, 바로 사업하나를 맡아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이런 경험들 때문에 낯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처음 맡은 일을 잘 처리해야겠다는 욕심과 현실 사이에서 조금 힘이 들었지만, 경험이 많은 선배 활동가들의 꼼꼼한 리드 덕분에 큰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활동가와 인턴, 사무처의 조직구조도 아주 인상적입니다. 활동 영역의 전문화와 인턴의 활동이 각 부문별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에서 단체의 전문성과 활동력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환경위원회를 통해서 그동안의 환경단체 활동경험과 문제의식을 풀어나가고 싶습니다. 민변의 활동이 법률적 지원에 관련된 부분들이라 환경단체처럼 활동 할 수는 없겠지만, 환경단체와의 지속적인 소통 통로를 열어두고 일상적 업무 협조의 방향성을 가지고 가면 환경운동 전반의 흐름을 꿰뚫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필요한 부분에서 연대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사안들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고, 긴급한 사안에 대해 회의테이블에 바로 참여할 수 있는 기동력이 되어 보겠습니다. 부족한 것은 발전시키고 모자란 것은 채워가는 노력하는 활동가로 민변의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활동가로 거듭나겠습니다.




- 글 / 어중선 간사          



2010/05/14 14:13 2010/05/1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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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영화 전문 변호사'다웠다. 한명숙 전 총리의 변호인단이 맡은 역할을 이렇게 요약했다.
“제작- 강금실 ·윤기원 / 감독- 백승헌 / 주연- 백승헌 ·박종문 / 시나리오- 김기중 ·정연순 ·김진”
무죄 선고 뒤에는, 영화가 끝났을 때처럼 멋지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을 것만 같았다.

  1시간 30분여 동안 영화 속의 세계에 빠져든 뒤,
엔딩 크레딧을 보며
그 세계를 창조해낸 과정의 지난함을 짐작해본다.
영화의 주역들을 소개하고 나서, 자신은 “작은 부분인 프로듀서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사람.
영화 <한명숙 전 총리 무죄 판결>의 프로듀서, 조광희 변호사를 만나서
재판 과정과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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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9일, 뇌물 수수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재판을 진행하시느라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 달 사이 재판을 17번 했습니다. 공판준비기일 3번, 재판 13번, 선고 1번을 했으니까요. 재판을 오전, 오후에 이어서하고 심지어 밤에도 했으니, 한 달 내내 계속 야근을 했지요.
 
변호를 맡기 전에는 한명숙 전 총리를 만나 뵌 적이 없었는데, 짧은 기간에 너무 자주 봤죠.(웃음) 옆에서 지켜본 한 전 총리는 굉장히 침착하고,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피고인이 믿을만하고 신뢰가 갈수록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데요, 그런 부분에서 한 전 총리의  역할이 컸습니다.



- 어떻게 한명숙 전 총리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되셨나요.

 한명숙 전 총리께서 저희 사무실(법무법인 원) 강금실 변호사를 찾아오셔서 변호를 요청하셨습니다. 일단 사무실 내에서 변호인단을 정했는데, 다른 변호사들에 비해 비교적 덜 바쁘다는 이유로 제가 사건을 맡게 됐고요. 변호인단이 여럿인데, 제가 주로 언론을 상대해서 신문 기사에 제 이름이 많이 나왔습니다. 꼭 제가 다 한 것처럼…(웃음). 누가 뭐래도 이번 재판에는 백승헌 변호사가 가장 큰 기여를 하셨지요. 



- 4월28일(인터뷰 진행 당일)에 검찰이 부패전담부에 한 전 총리의 항소심을 배당했습니다.
  앞으로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궁금합니다. 

2심 재판이 1심처럼 빨리 진행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1심에서 워낙 상세하게 재판이 이뤄졌기 때문에 2심에서는 할 일이 아주 많을 것 같지는 않아요.



- 기존의 재판이 조서중심주의로 진행됐던 데 비해, 이번 재판은 공판중심주의를 이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공판중심주의 실현은 이번 판결의 큰 의미 중 하나죠. 검찰도 나름의 입장과 목표가 있겠지만, 검찰의 수사방향이 얼마나 공정하고 객관적 진실에 부합하는지는 법원에서 다시 따져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한 전 총리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이번 사건에는 (돈을) 줬다는 사람의 증언만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돈을 받았다, 아니다를 입증할 수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돈을) 준 사람의 말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또 정황이 얼마나 합리적인지를 놓고 판단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곽영욱 씨 증언에 일관성이 없다는 사실과, 곽영욱 씨가 한 전 총리에게 돈을 줬다고 주장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러한 말을 해야 할 궁박한 상황의 여부 등을 통해 무죄를 입증했는데요, 이 과정이 만만하지는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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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동안 전업으로 영화사 대표 일을 하시다가 작년에 변호사로 복귀하셨습니다.
  지금은 겸업을 하고 계신데요.  
  처음에 영화사 대표직을 수락했을 때, 3년만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얼마든지 길어질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근래 한국 영화계의 사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멋진 하루>와 <밤과 낮> 두 편을 만들었지만 그 외에 무수히 많은 기획이 무산됐어요. 먹고 사는데 어려움이 생기더군요. 잘 되고 있었으면 굳이 돌아올 일은 없었겠지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번 씩 출근해서 영화사의 행정을 돌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올해 영화를 한 편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투자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게 하나 있어요. 


- 영화 전문 변호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영화 검열 조항의 위헌제청 소송 등
  영화 관련 송사들을 맡으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영화 관련 법률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90년대 중반에는 국가보안법 사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들을 담당하면서 ‘표현의 자유’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당시에는 영화에도 검열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영화에 있어 표현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영화계 사람들과 같이 일하다 보니 영화법을 전문분야로 하게 되었어요. 



- 10년 넘게 우리 사회의 ‘표현의 자유’ 확립을 위해 노력해 오셨습니다.
  시작할 당시와 비교했을 때 많은 변화가 있는지요.

 영화와 관련해서는 표현의 자유가 상당히 진전됐습니다. 1996년에 사전심의가 위헌이 됐고, 2001년에는 등급보류제도가 위헌이 됐습니다. 이로 인해서 ‘제한상영관’이라는 것이 생겼는데, 제한상영관도 몇 년 전 해당조항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위헌이 되었어요. 하지만 최근에 정부가 바뀌면서, 인터넷과 관련한 표현의 자유는 위축되고 있습니다. 선거법에서의 트위터 규제는 선거의 역동성을 해치는 것 같아요. 이를 제한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입니다.



- 중앙대학교에서 문화예술법 강의를 하고 계신데요,
  문화관련 법 영역의 전망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문화법 영역은 넓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예상합니다. 예전에는 우리나라의 영화 시장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영화와 관련된 전문적 자문의 수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영화 산업이 발전하면서 법적인 도움이 필요해졌고, 우연찮게 제가 그 일을 하게 됐던 겁니다. 그런데 문화 산업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에 비해 사이즈가 크지 않습니다. 법적인 수요가 반드시 늘어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국 영화시장의 규모가 1-2조원입니다. 다른 산업 규모에 비해 작은 사이즈라서 농담 삼아 “자일리톨 껌 시장만하다”고 합니다. 합법 다운로드로 암시장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한국 영화의 돌파구라고 생각합니다. 



- 영화 일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직업상 하는 일을 그 자체로 즐기기는 쉽지 않죠. 하지만 영화나 예술 방면의 직업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사 대표를 맡고 나니까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영화 일이 잘 되었으면 즐거웠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저는 기획자나 프로듀서가 아닌 관리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한계도 있었고요.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해볼 만한데 저한테 큰 재능은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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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무엇인가요.
 최근에는 한명숙 전 총리 사건으로 바빠서 영화를 못 봤어요. 보통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가서 보는데, 몇 달 동안이나 영화관에 안 갔네요. 


- 어떤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호러 영화는 안 좋아하고, 서사적이고 서정적인 영화를 즐겨 봅니다. 시드니 루멧 감독을 좋아하는데, <허공에의 질주>를 추천하고 싶어요. 






 

 인터뷰 / 홍보출판팀 박초롱, 김란아 인턴
 -  글  / 박초롱 인턴

- 편집 / 김란아 인턴
 

2010/04/30 11:39 2010/04/3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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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2월, 변호사 개업을 하자마자 국가보안법과 싸우기 시작했다. 친한 대학동기 중 1명이
 국보법 위반으로 8년형을 선고받고 7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국보법 위반으로 수배된 경원
 대학교 학생을 변호했다. 정의로운 일을 하다가 처벌받게 된
대학생 피고인을 돕고자 시작한 변
 론이었다. 같은 해 민혁당 사건, 방북단 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국가보안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됐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국보법 전문'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수많은 사건을
 맡아왔다. 송두율교수 사건, 간첩 민경우 사건, 일심회 사건, 아람회 사건 등을 맡아 변호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2009년 법정에서 그는 변호인이 아니라 피고인의 자리에 섰다.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실천연대) 활동으로 인해 '이적단체구성'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진술서에서 그는 "10년 내내 누구보다 많이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을 맡아 변론해온 제가 오히려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법정에 서고 보니 마음이 더욱 무겁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보법 폐지의
 당위성을 하나하나 짚어나갔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항소했다.

  김승교 변호사는 현재 항소심을 진행하고 있다. 4월 1일에 첫 재판을 했고, 5월 6일에 두 번째
 재판이 있다. 항소심은 1년 가까이 걸릴 것이라 한다. 번잡한 서초의 법원가에서 떨어져 도봉구
 에 위치한 김승교 변호사의 사무실을 방문해 최근 근황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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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연대 상임공동대표로서 국보법 위반 혐의를 받으셨는데요, 실천연대에서는 요즘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직책은 그대로이고, 여전히 평화운동, 통일운동 중심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통일부 장관 퇴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부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이 통일부 장관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실천연대는 이름처럼 '실천'을 위주로 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을 해온 편입니다. 매주 미 대사관 앞에서 금요집회를 열고 있고, 광우병 촛불 시위 때는 '6.15 TV'를 통해 시위를 24시간 생중계 했습니다. 노무현 정부 아래서는 통일부에 사회단체 등록을 했고, 정부 지원금도 받았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등록을 취소당하고 지원금도 끊겼습니다. 2000년에 만든 이후로 사업 제재를 받은 적은 처음입니다.

 

- 작년에는 80년대의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인 '아람회 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내셨는데요.

 아람회 사건 승소는 개인적으로 상당히 뜻 깊은 일이었습니다. 2000년 4월에 사건을 시작한 뒤 꼬박 10년이 걸렸습니다. 1999년 말, 8.15 통일행사 참여로 수배된 한겨레신문 기자의 변호를 맡았습니다. 이 분이 아람회 사건의 피해자였습니다. 형사재판을 마치고 나자, 아람회 사건의 재심을 청구하셔서 제가 변론을 하게 된 것입니다.

람회 사건은 실천연대에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람회 사건을 의뢰하신 박해 전 씨가 2000년 10월에 실천연대 만드셨습니다. 같이 활동하자고 제안하셔서 처음에는 감사로서 참여했습니다.

   

- 아람회 사건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재판을 시작하면 모두진술 기회를 줍니다. 이 사건은 조작이 명백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재판을 마치자고 해서 모두진술을 1명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나머지 분들도 할 이야기가 있으면 해보시라"고 해서 피고인 다섯 분이 즉석에서 진술을 하게 됐습니다. 준비를 하지 않았지만 글로 쓴 것 이상으로 논리 정연하고 또 감동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아람회 사건 피고인들의 특징은 신분이 안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 3명, 검찰 공무원 1명, 경찰 공무원 1명, 육군 대위 1명, 새마을금고직원 1명 총 일곱 명입니다. 이런 분들의 인생행로가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한 분은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고, 온 몸이 '종합병원'일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아지신 분도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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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국가보안법이 ‘죽은 법’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근래에도 국보법위반으로 기소되는 경우가 많나요.

 심지어 변호사들도 “아직도 국보법 사건이 있느냐”고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판결 많습니다. 작년에 100건이 넘었을 겁니다. 거의 다 유죄판결이고 완전무죄판결은 5% 정도입니다. 국보법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가 애매모호해서 최근에는 인터넷에 글을 쓴 사람들도 국보법 위반으로 많이 기소되고 있습니다.

 수사를 시작하는 계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고소·고발·진정과 인지수사입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인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지는 검찰이 하기보다는 국정원, 보안수사대, 기무사, 경찰수사기관 등에서 합니다. 이러한 정보인력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사건을 낳고 있습니다. 현재 경찰 보안수사 관련 인력이 4000명 정도 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간 보안수사 인력을 1000명 가까이 줄였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1년 만에 다시 1000명을 늘렸다고 합니다. 사건은 적은데 인력이 과도하게 배치되어 있다 보니, 생존을 위해 수사 인력들이 사건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 민변 활동도 빼놓을 수 없죠. 최근 활동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99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바로 민변에 가입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의 진보, 민주화, 변화에 기여할 수 있을까 고민을 하다가 사법시험을 치기로 결심했습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을 사회 운동의 수단으로 생각했던 셈입니다. 변호사 개업을 하면 민변은 당연히 가입해야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초창기에는 열심히 민변 활동을 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도봉구로 2007년에 사무실을 옮기면서 거리가 멀어져서 근 2년 정도는 소홀했습니다. 지금은 미군위원회, 통일위원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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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에 도봉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는데, 출마를 결심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선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결정한 출마였습니다.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나가려면 시작이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민주노동당을 국민들이 알아주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직접 나서서 호소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민주노동당에는 분당 등 내부적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참 성장하던 정당이 좌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위기감이 들어서 당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길인 것을 알았지만 사무실까지 지역구인 도봉구로 옮겨가면서 출마를 했습니다.

  

- 도봉구 사무실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시내는 너무 번다하고 복잡한데, 여기오니 여유가 있습니다. 안정감도 있고요. 제가 대학 시절부터 이사를 좀 많이 다녔습니다. 2년마다 이사를 다니면서 성북구, 강북구, 중구, 관악구, 강서구 등 서울 곳곳에서 살아봤는데 도봉구에는 꽤 오래 살고 있는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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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이신 황정화 변호사님과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시는데요, 장단점이 무엇인가요.

 아직까지는 편한 점이 더 많습니다. 재판이 겹친다거나, 상담 때문에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서로서로가 부탁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친한 관계라도 일 관련 부탁은 어려울 수 있는데, 부담없이 서로를 도울 수 있어서 좋습니다.

  

- 주체창법을 구사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

 노래할 때 음정과 박자가 제멋대로라서 ‘주체창법’이라 불립니다. (웃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 )







 


- 인터뷰 / 홍보출판팀 김란아, 박초롱 인턴
- 글 / 박초롱 인턴

 
2010/04/14 13:37 2010/04/14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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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순 사건과 부산 여중생 살해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 강화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정부와 여당은 전자발찌 소급적용 법안을 추진하는 동시에 인터넷으로 성범죄자의 신상정보를 공개할 방침을 세웠습니다. 사건이 있을 때마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처벌 강화법은 왜 이전에 사건을 방지할 수 없었던 것인지 안타까움만을 더합니다. 최근 민변에서는 <특정 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의견서>를 발표했는데요, 의견서 작성에 참여하신 민변 회원 이경환 변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1년차 회원인 이경환 변호사는 2003년부터 꾸준히 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하며 성범죄 피해자를 돕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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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환 변호사님은, 남성으로서는 드물게 여성위원회 소속 회원이십니다.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지시게 되신 계기가 무엇인가요?

2차 사법시험을 마치고 나서, 우연한 기회에 학교에서 성폭력상담소의 ‘시민감시단’ 모집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후배와 함께 한 번 해보자며 간 것이 지금까지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상담소에서는 수사기관이나 재판기관에 의해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2차 피해’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재판과정을 모니터링하며 피해 상황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상담소에서 처음으로 맡은 사건은, 증인신문을 7시간이 넘게 했을 만큼 치열하게 다툰 케이스였어요. 형법이나 형소법을 이미 이론적으로 공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증인신문 과정을 겪는 피해자 분께 무슨 말을 해드려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분들은 그저 옆에 있어드리는 단순한 도움만으로도 굉장히 고마워하시고 큰 힘을 얻으시더라고요. 그때 많은 것을 느꼈고, 실무 지식을 빨리 습득해서 피해자분들께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성폭력방지관련법안 검토의견'을 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자발찌, 화학적 거세 등 최근의 성폭력 처벌 강화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 사건들의 영향으로 2008년부터 계류되어 있던 법안들이 한꺼번에 검토되고 있는데요,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검토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자발찌의 경우에는 일정 부분 효과가 기대되는 측면이 있지만, 지금과 같이 여론을 의식해 성급하고 감정적인 추진을 한다면 전체 성폭력 대책의 관점에서 볼 때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성폭력과 관련된 모든 이슈들이 법제화로 모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폭력 분야에 있어서는 그동안 비교적 여러 입법적, 제도적 개선이 있어 온 편임에도 불구하고, 실무에서는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근본적인 문제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없는 한, 아무리 전자발찌를 채우고 절차를 법에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절차들을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법제화에만 치중하다 보면 형식적인 법의 변화만으로도 현실이 개선되었다는 잘못된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가시적이고 홍보하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자발찌나 화학적 거세에 다른 성폭력 정책의 예산과 인력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법제에 대한 지나친 치중은 현장에서 직접 피해자를 대면하고, 그들을 돕는 현장의 노력을 잠식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잊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성범죄 처벌과 관련한 현 법적체계의 문제점과 시정해야할 점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친고죄 폐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습니다. 강간죄 개념의 재정립 또한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부녀로만 한정돼 있어서 동성 간 성폭력이 포섭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성 간 성폭력은 유사성행위로 인정되어 성폭력이 아닌 강제추행으로 처벌받는 문제점 또한 있습니다. 폭행협박을 '최협의'로 인정하고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 또한 큽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하니, 특별법을 수정만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형법개정안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성폭력 관련 특별법이 워낙 여러 개가 제정이 되어있다 보니 법 사이에 체계가 많이 흐트러져 있습니다. 저는 여러 개의 특별법을 형법으로 합치자는 측면에 원칙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성단체도 제안을 했고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데, 현재 상태에서 제대로 된 형법 체계를 만들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판단됩니다. 대대적인 수술을 해야지만 하나로 합칠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많이 어그러져 있습니다. 형법으로의 개정 논의가 있을 때, 어렵긴 하지만 하나로 합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문제에 대해 짚어보고 싶습니다. 성폭력특별법에 의해서 법원이나 검찰 모두 성폭력전담부와 검사를 두고 있습니다. 정기적인 교육도 실시하고 있고요. 그러나 아직 형식적인 측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교육의 연구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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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민변에서는 여당이 내놓은 전자발찌와 약물치료에 대한 법률안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는데요. 그 내용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여당의 법률안은 위치추적 전자장치의 부착대상을 현행법 공포 이전의 성범죄자에 대해서도 소급적용하는 등 적용대상을 확장하고, 부착기간을 최장 50년까지 상향 조정한다는 내용입니다. 위 법안들은 여론에 편승하여 충분한 검토 없이 급속히 만들어졌기에 법률안 그 자체에 내재된 문제도 많고, 위헌의 소지가 큽니다. 전자장치 부착대상의 결정 기준이 자의적이 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화학적 거세라고 불리는 약물치료는 기본적으로 심리치료나 교육 등에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금세 효과는 사라집니다. 현 정부 들어 성범죄 관련예산이 계속 삭감되어왔는데, 근본적인 대책을 위한 지원은 줄고 자극적인 법안에만 관심이 집중돼 문제입니다.


-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경이 틀렸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정말 ‘맨 정신으로 한 행위’와 ‘(범행을 의도하지 않고) 술에 취해서 한 행위’를 다르게 취급해야 할 경우도 있기에, 심신미약 감경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은 아니에요.

 그러나 많은 경우, 성범죄는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범행이 가능한 장소도 물색해야 하고, 자신이 접근해서 제압할 수 있는 대상도 선정해야 하기 때문이죠. 이러한 계획적인 범죄자들이 술을 핑계로 심신미약을 악용하지 못하도록 전문가 진단 등의 절차를 더욱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또, 많은 경우 심신미약 감경은 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에, 너무 과하게 내려졌다고 판단된 형을 감경하기 위한 이유로 사용되는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작량감경으로도 부족할만큼 형이 지나치다면 제도를 통해 형기를 고쳐 해결할 일이지, 감경을 위해 ‘술을 먹이는’ 관행은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감경의 남용 문제는 아동성폭력만의 문제가 전혀 아니며 오히려 성인피해자에게 더욱 문제가 됨에도, 현재 개정안들이 13세 미만에 대한 성폭력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권리에도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아는데, ‘피해생존자’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성범죄의 ‘피해자’는 마치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슬픔에 젖어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 피해자 분들 중에는, 용기를 가지고 아픔을 딛고 일어나 더 씩씩하게 생활하시려는 분들도 많아요. 저는 그런 분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성폭력 피해는 인생의 한 단계에서 겪을 수 있는 불행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특수한 것이고,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해자의 회복이나 가해자의 처벌, 그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survivor)'는 영어를 그대로 풀어쓴 작위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저도 처음에는 약간 어색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을 만나고 일반 사람들의 고착화된 인식을 접하면서 이러한 용어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피해자에 대한 고정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 무조건 성폭력 피해사실을 잊으라고 하거나 피해자를 어딘가 손상을 입은 2등 시민으로 보는 시각이 아닌, 그분들의 극복의지와 노력을 지지하고 존중한다는 측면에서 '피해생존자'는 굉장히 의미 있고 적합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에 대한 인식변화는 수사나 재판 등 사법절차에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에도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 여성문제 관련 분야에서 일을 하면서 느끼는 매력이나 보람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남성으로서 제가 일부러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잘 알기가 어려운 숨겨진 차별이나 인권침해의 문제를 배우고,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여성문제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람이 있을 때는 법학과 여성학의 연결고리가 될 때입니다. 여성학이나 법여성학 쪽에는 깊이 있고 반영할 만한 좋은 연구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연구가 사회학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보니 법조인들이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법조계에는 법조계의 특수한 언어와 사건처리 구조가 존재하니까, 여성운동계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오해하거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많은 경우, 중간에 연결만 잘 시켜줘도 양쪽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상담소에서 지원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피해자들이나 상담소 입장을 반영해 법적 언어로 정리를 했을 때 변론이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기쁩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배우면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습니다.

  

- 민변에 가입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예전부터 가장 활발하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해 온 곳이어서 당연히 가입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펌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더 많은 활동에 참여하지 못해 아쉬움을 느낄때도 있습니다.

   

- 변호사로서 바쁜 업무에 시달리실 텐데요, 회사생활과 사회운동을 병행하실 수 있는 비결이 뭔가요?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양쪽 모두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 앞으로도 계속 잘 유지해나가실 자신은 있으신가요? ^^

자신까진 없고, 계속 노력해야죠. (웃음)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마음을 보듬는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








- 인터뷰/ 홍보출판팀 김란아, 박초롱 인턴



2010/03/31 14:55 2010/03/3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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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진실이 몹시 그립습니다
 
- 한명숙 전 총리의 진실과 승리를 믿으며 -
                                                                                                       박 연 철



 한 전 총리의 재판이 시작되던 날이었다. 가슴속에서 뭉클하게 그 여성에게는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펴 올랐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사무실 직원에게 「(나는) 한명숙 님의 진실과 승리를 믿고 있습니다」라는 피켓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정말 피케팅을 할 셈이에요?’ 하고 약간 놀란 듯 반문을 하고서도 직원은 피켓을 A4용지 위에 잘 만들어 놓았다.

나의 피케팅은 법조인다운 자세는 아니다.

 어떤 간의 진실을 ‘믿음’에 의해서 가려내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더욱이 정치인의 정직성과 청렴성에 대하여 ‘믿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접근이다. 한 전 총리에 대하여는 대한민국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한 것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정치적 탄압의 목적으로 전(前)총리를 기소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국민들은 아무런 근거 없이 기소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정치인의 수뢰사건에 관하여 몇몇이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그것이 법률적인 재판상의 무죄인지, 실제로 전혀 뇌물을 받지 않은 무고한 자로서 무죄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어 지금까지 의혹을 품고 있는 경우도 있다. 한 전 총리에 대하여도 돈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녀를 에워싼 진영(陣營)에서 극구 안 받았다고 부인하도록 만류하여 부인하는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는 풍문도 들려왔다. 만약 실체적 진실이 그러하다면, 노무현 정권하에서 한 전 총리마저도 뇌물을 수수한 배신적인 인물이고, 노무현 정권의 상징적 도덕성은 더 이상 말할 여지도 없게 되고 만다. 노무현 정권을 지지했던 이들의 최소한의 도덕적 경계마저도 무참히 무너져 내리고 마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한 전 총리마저 재야시절의 도덕적 일관성을 찾지 못하면 그 마음의 허망함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는지 눈앞이 어두워지는 일이다.

 나도 나 스스로의 정직성과 청렴성, 진실과 정의에 관하여 한발 물러서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가치적 용어의 완전성을 생각하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때, 그에 부합되지 않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공직자로서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은 매우 당연한 덕목을 앞세우는 것과 같이 민망스런 일이다. 청렴한 공직자로서 그 청렴성이 고리가 되어, 세상을 바르게 펴고, 그가 제안한 사업과 제도에 관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신뢰를 하고 진실하게 협력하여 발전적 단계로 나아갔다고 했을 때 비로소 밝은 등불로서의 청렴성이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만약 한 전총리가 뇌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진영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치적인 대응을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맥빠지는 일인가? 죄와 허물을 바로 하는 집단의 움직임이 모두 허깨비 같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그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격려가 될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만약 사실이 그와 다르다면 평상시에 그녀를 막연히 신뢰하였기에 지금도 ‘바보처럼’ 신뢰한다는 말을 하는 꼴이 되는 것일까? 그녀가 뇌물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믿음’의 기반도 없어지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게 뒤숭숭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어쨌든, 그날 오후 1시 30분경 ‘(나는) 한명숙 님의 진실과 승리를 믿고 있습니다’라고 쓴 A4용지를 품에 안고 법원에 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동문 앞에는 백합을 든 이들이 모여서 있었다. ‘도착하셨나요?’ 하고 물으니 ‘아직 도착은 안하셨다’고 한다. 이 정도의 열띤 분위기라면 피케팅을 하여도 좋을 것 같았다. 법원 내부에 들어가 보니 서쪽 출입구에 카메라맨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나는 그곳 2층에서 기다리면서 지켜보았다. 이윽고, 여러 인사들과 함께 한 전총리가 들어서면서 카메라 플래시들이 쉴새없이 터졌다. 한 전 총리는 1층에서 기다리던 몇몇 인사와 인사를 나누고, 내가 서 있는 2층은 쳐다볼 새도 없는 듯하였다. 그날 피켓은 「MB독재반대」하나 정도였다. 나는 한 전 총리의 입장을 묵묵히 바라보았고, 피케팅은 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피케팅을 해도 좋지 않을까?

 법정에는 가보지 못하였으나, 어느 날 곽영욱 사장의 법정진술 내용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었다. 검찰에서 그와 같은 진술을 하게 된 배경이 드러나고 그의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보도 수준은 곽영욱의 진술이 그 정도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재판을 종료하고 한 전 총리의 무죄를 선고하여야 할 정도였으나, 다른 신문을 보았더니, 그 보도수준이 곽영욱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고 있으나, 여전히 5만 불의 뇌물을 전한 것은 맞다고 검찰이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재판부에서 ‘검찰에 대하여 공소장의 변경을 검토해 보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한 전 총리의 인간적 진실에 대한 믿음이 되살아나오며, 마음이 가벼워지고,
즐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피케팅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금요일 친구네 결혼식에 참석하였을 때, 검사를 지낸 어느 변호사에게, 한 전 총리의 사건은 어떻게 되어 갈 것 같으냐고 의견을 물어보았더니, ‘뻔한 것 아니야? 뇌물을 받지 않으려면, 공관에 민간인은 왜 불러들여? 공관이 민간인 불러들이라고 있는 곳이야?’라고 반응한다. 그도 변호사가 된지 수년이 흘렀으나, 여전히 검사와 같은 수리매의 시각을 가졌고, 어느 한 진영에 속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곽영욱의 오락가락하는 진술에 비추어 볼 때 판결이 어떻게 날 것인지 그의 심증에 대하여 알고 싶었던 것인데, 거기에 대해서도, 돈을 ‘주었다’와 ‘놓고 왔다’는 같은 표현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견해를 듣고 공관에 민간인을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독단적인 견해인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공관에 민간인을 초청하는 데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그만 허물도 남겨서는 안 될 터이니까...

 어찌하였든, 나는 곽영욱의 진술을 전해 듣고, 이 사건에 관한 한 전 총리의 진실을 믿기 시작하였다. 내 스스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려 하면서 주저했던 때와 달리. ‘믿음’이 검증을 받으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실에 대한 믿음... 얼마나 그리운 말인가. 인간에 대한 믿음...얼마나 절실한 소망인가. 현 정권이 전 정권의 총리를 무덤으로 내려 보내기 위하여 화형대 위에 세운 것과도 같은 이 재판에서 그녀의 진실이 ‘샛별’처럼 빛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 될 것인가?


                   한명숙 님. 한 인간의 진실이 몹시 그립습니다.
                                              한 사건에서만 무고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모든 것에서 진실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인간이 더욱 그립습니다.


 곽영욱 사장의 이기심과 거짓됨이 이와 같은 사건을 야기하였고, 검찰에서도 이만하면 기소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였을지 모르나, 검찰의 기소는 결국 곽영욱의 거짓됨과 검찰의 정치 지향적 속단이 빚은 우화(寓話)로서, 검찰이 깊이 自省하여야 할 사건이 될 것 같다. 이 상황에서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이 기대되지만, ‘공소장변경’을 요청한 취지가 무엇일지, 공소장을 변경하면 유죄선고를 할 수 있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변호인들이 더욱 발분하여, 우리 국민들이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명백한 무죄의 증거를 현출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검찰에서 유죄의 증거를 현출시키지 못하면 무죄를 선고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은 법정다툼에서 결론을 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국민 앞에서 공의(公義)가 하수(河水)같이 흘러 내려야 할 사건이기 때문이다.

 전 고검장(심재륜)은, 어떤 정치적 사건은, 검찰이 청와대의 눈치를 살펴 알아서 앞장선 일이 없지 않았음을 고백한 일이 있었다. 이 사건도 그와 같은 정치적 사건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에서 대체로 집권층은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 왔다. 독재시대에, 너무나도 명백하고 엄연한 무죄의 증거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죄판결을 선고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 독재시대에 대한 향수를 지닌 듯한 인사들의 발언이 잦아 상당히 염려는 되지만, 이 사건의 재판부는 공정하고 명쾌한 사법부의 길을 유지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순수함에 대한 정치적 공격은 민주주의적 반전(反轉)의 기회를 주고, 정치집단 사이의 대등성을 회복하여 준다. 대립하는 상대 당을 박살내려는 음모나 치기가 수치스럽게 되고, 정치계의 평형과 건전성이 회복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치적 음모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가는 것이다.

이 사건이 바로 그러한 사건이 되었으면,
그리고 한 인간의 진실이 우리 가슴에 生水처럼 흘러내리는 사건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진실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일 같은 좌석에 있었던 정세균 현 민주당 대표도, 그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기꺼이 법정의 증인으로 출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실을 넘어서는 정당은 없으니까.

마음속의 피케팅은 이미 시작되었고,

실제로 피케팅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어느 한 여성정치인에 대한 행동이라는 것이 쑥스럽고, 다른 많은 믿을만한 여성정치인들이 많다는 것도 생각하고, 또한 나의 피케팅이 어느 한 진영의 행동일 뿐으로 평가되는 것도 마뜩잖아 계속 망설이게 되겠지만) 3월 21일 춘분에는, 그 전날의 종잡을 수 없는 우울한 황사의 날이 완전히 가시었다.



 

2010/03/22 18:07 2010/03/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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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어느 때보다 사형제 존폐에 관한 논란이 고조되는 듯한 요즘,
민변에서는 사형제 위헌제청소송을 담당하신 이상갑 변호사님과의 지면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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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제 폐지 소송 대리인을
   맡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해사건 피고인은 2008년 2월 20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피고인의 국선변호인은 항소이유로 형이 너무 과중하다는 점만을 주장하였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정신감정, 판결전조사절차 등을 거친 결과 특이한 점이 없자 국선변호인에게 사형제에 대한 위헌제청신청을 권유하였습니다. 당시 국선변호인은 2008년 9월 초 위헌제청신청을 하였고, 재판부는 같은 달 17일 위헌제청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건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 위헌제청사건을 2009년도의 중요사건으로 분류하여 공개심리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된 분께서 개인적인 사정상 사형제 위헌소송 맡기 어렵다는 입장을 피력하셨습니다. 이에 광주고등법원(이하 광주고법) 형사부는 광주지방변호사회(이하 광주지변)에 사형제 위헌소송사건의 국선변호인을 추천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고, 광주지변 노영대 회장님께서 저에게 위헌소송을 맡아볼 것을 권유하셨습니다.

 처음 제안을 받고서는, 이 사건이 갖는 사회적ㆍ역사적 무게가 너무 커서 감당하기 벅차다고 판단하여 거절하였지만, 다음날 광주고법 형사부장님께서 다시 연락을 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해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다음, 민변 백승헌 회장님께 전화를 하여 민변차원에서 공동변호인을 구성하여 지원해주실 수 있는지 여부를 문의하였고, 백회장님의 알선으로 오래전부터 사형폐지운동을 해오고 계신 김형태 변호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김변호사님이 종래 사형폐지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오시던 이상혁 변호사님 등과 변호인단을 구성해주시겠다고 하여, 저도 광주고법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형제 위헌소송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사형제 폐지를 지지하시는 이유도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당시까지만 하여도, 개인적으로는 사형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할만한 논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헌재의 공개변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연구자료 등을 공부하면서 사형제가 법리상 위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위헌이라고 생각하는 근거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은 사형제가 헌법 제37조 제2항 단서에 위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양적으로 분할하는 것이 불가능한 개념이므로, 사형은 피고인의 생명권 전부를 박탈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법률에 의해 기본권을 제한하더라도 그 어떤 이유로도 본질적 부분은 침해할 수 없는 것인데, 사형은 생명권 전부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또한 유엔에서도 발표한 적이 있듯이, 사형제가 일반예방적 효과가 있는지도 회의적입니다. 헌재결정문 중 소수의견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사형집행이 중단된 1996년 12월 이후 흉악범죄가 종전보다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았습니다. 사형제가 필요악이라면, 왜 190여개 국가 중 138개국이 사형제를 입법적으로 완전히 폐지하거나 사실상 폐지했겠습니까.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흉악범을 사형시킬 것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흉악범죄가 발생하는 원인을 규명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강화하고, 흉악 범죄로 인해 피해자의 유족들이 겪게 되는 아픔을 사회적으로나마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행 범죄피해자구조법은 일정한 요건이 모두 갖추어진 경우 최고 3천만 원을 보상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는데, 범죄피해자를 위한 국가의 구조로는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금전적 구조와 정신적 치료 등 다각적인 피해구조대책에 대한 검토가, 사형제 유지 여부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인데 관심이 부족한 듯합니다.



- 12월에 선고가 내려질 뻔했는데, 재판관들 사이에서도 찬반 논란이 심해 
  결정이 미뤄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심정은 어떠셨는지요?

 선고기일에 대해서는 줄곧 관심을 가지고 체크했었습니다. 결정이 언제 내려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결과가 문제였기 때문에, 연기되는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걱정했던 것은, 만약 합헌결정이 나오면 13년간 중단되었던 사형집행이 재개될 명분으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걱정은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합헌 결정이 나온 직후인 지난 3월 11일(이날은 우연히도 당해사건 피고인에 대한 광주고등법원 형사부의 재판이 재개된 날이기도 합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안상수 원내대표가 헌재의 합헌결정 및 김길태 사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선별적 사형집행론을 제기하였습니다. 현재 형이 확정된 사형수 중 성폭력범죄자와 연쇄살인범에 한정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문제를 검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별적 집행론은 그 표현과 달리 사실은 모든 사형수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자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형이 확정된 사형수는 거의 모두 성폭력범이거나 연쇄살인범이기 때문입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사실상 사형폐지국가로서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번 사형제 위헌소송을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지요. 위헌제청신청을 권유하였던 재판부는 사형제가 위헌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는 법전상의 사형제를 현실의 제도로 다시 끌어내게 되는 아이러니를 유발하게 되는 셈입니다.



- 합헌으로 판결이 나긴 했지만, 7:2에서 5:4로 팽팽한 접전이었습니다. 희망이 보이시는지?

 유럽의 경우 벨로루시 1개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가 사형제를 폐지하였고, OECD 30개 회원국 중에는 한, 미, 일 3국만이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형제를 존치하고 집행하고 있는 나라가 2008년 기준으로 59개국인데 그 중 5개국의 사형집행자 수가 전 세계 사형집행자수의 약 93%라고 합니다. 이 정도면, 사형제 폐지 또는 부집행은 이미 전 세계적 추세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헌재의 합헌의견도 현행 헌법의 ‘해석상’ 사형제가 위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지 ‘입법론적 관점'에서도
정당성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합헌의견을 제출한 재판관들도 대부분 헌법개정 또는 사형폐지 법률제정 등의
입법적 방법으로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온 셈입니다.

 지난 15대 국회 이후 지금의 18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사형폐지 법률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국회 내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2개의 법률안이 제출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앞으로 사형제 폐지문제에 대하여 국회의 논의를 촉구하는 방향으로 힘을 모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도 사형폐지법률 제정 방법으로 사형제를 폐지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변호사님이 생각하시는 가장 바람직한 사형제 폐지 방안은 무엇인가요?

 
사형제 폐지 여부는, 국민의 법 감정도 고려하여야 하겠지만 여론에 의해 결론을 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나 화형, 궁형 등이 폐지된 것도 여론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형벌이 인간의 존엄성에 반한다는 의식계몽 영향 아닙니까? 프랑스뿐만 아니라 입법에 의해 사형제를 폐지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폐지 당시 폐지찬성론이 30% 정도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존치론이 60%이상이었구요.

 우리나라도 거의 비슷한 상황입니다. 갤럽이 우리나라에서 지난 10여 년간 주기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결과에 의하면 사형제 폐지 의견은 항상 30% 내지 40%입니다. 흉악범죄가 잇따라 발생하면 존치론이 조금 더 높아지고, 대체형으로 절대적 종신형(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을 도입할 경우의 폐지론은 50%를 약간 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형제의 문제점, 대체형 도입, 피해자에 대한 보다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보호대책 등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해나가면 사형제 폐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도 더 진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 또는 국회가 중심이 되어 이러한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 상당히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백화점에서 장사를 하려면 특정상품만 전문적으로 팔아도 되지만,
 동네 슈퍼마켓은 웬만한 물건은 다 있어야 하잖습니까? (웃음)



- 제6대 민변 광주·전남지부장에 취임하시면서, ‘지역사회 현장과 소통하는 민변지부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내비치셨는데요.
 그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 그리고 앞으로의 다짐을 부탁드립니다.

 지난해 10월에 지부장이 된 이래 지역 시민사회단체 특히 건치(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건약(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인의협(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등 전문직 단체 등과의 연대활동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분기마다 공동강연을 개최하기로 합의해서, 이정희 의원 초청강연을 한차례 했습니다. 2분기에는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님 초청강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정기 강연 이외에도 수시로 공동관심사에 대한 활동을 함께 하려고 합니다.

 3월말에는 4대강사업과 관련한 토론회와 영산강 순례를 건치지부와 함께 하기로 했고, 위 전문직 단체와 지난해부터 함께 해온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해방 전 당시 중학생 나이에 일본에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임금을 받지 못한 할머니들의 지원하는 모임. 최근 일본 후생노동성이 후생연금탈퇴수당으로 99엔을 지급한 사건으로 전국적 관심사가 되고 있음) 활동도 올해에는 더욱 진전시킬 계획입니다. 금년 5ㆍ18 30주년에는 대구, 부산 등 민변지부 회원들을 광주로 초청하여 5ㆍ18묘지 참배와 무등산 산행 등 지부 간 단합활동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4대강 사업을 매개로 지역 종교단체와의 연대활동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종전처럼, 소송으로 비화된 사건에 대한 변론활동도 열심히 하여야 하겠지만,
좀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현장 활동으로 지역인권단체들과의 연대를 강화하려고 생각중입니다.




-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사회를 열기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시는 모습, 기대하겠습니다! : )    




 

[ 작성 : 김란아 인턴 ]   

2010/03/15 10:32 2010/03/15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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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그녀의 걸음걸이에 괜한 인터뷰어의 마음까지 분주해졌다. 막상 마주앉은 것은 처음이었지만, 민변 사무실을 지키다보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이름 중의 하나. 김진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없는 시간을 쪼개 앉아있는 통에 살짝 들뜬 분위기 가운데 진행됐지만, 싫은 내색은 추호도 않았던 그녀 덕에 시종 유쾌할 수 있었다. 낯간지러운 말은 피하는 기색이었지만, 당당한 말투와 진솔한 표정은 이미 많은 말들을 건네고 있었다.


새 여성위원장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민변 내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게 되셨는데, 수임을 결정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단지 순서가 되어서 맡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차례가 와서 직분을 받아드리게 된 것이지 특별한 이유는 없다.

열정적인 민변 변호사님이라는 주위의 추천이 많았습니다. 지난 2007년까지 민변의 사무차장을 지내셨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민변의 여성위원장으로 복귀하시기 까지 지치시거나 힘드셨던 것은 없으셨나요?

특별히 힘들거나 어려웠던 것은 없었다. 이전의 많은 사무차장님들이 임기를 마친 후에도 바로 업무에 복귀해 활동하시는 모습을 봐왔었는데 오히려 나는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었다. 여성위원장 활동을 해나가는 데에도 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워낙 여성위원회 변호사님들이 열성적이시기 때문에 위원장이라고 해도 할 일은 많지 않을 듯 싶다.



최근 근황이 궁금합니다. 요즘 중점을 두고 계시거나 참여하고 있는 사안이 있으시다면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노동 사건을 주로 다루고 있다. 전교조 관련 사건이 현안인데 여기에 중점을 두고 활동 중이다. 관련 사건이 많은데 간단히 진행 상황을 정리해 본다면, 현재 기소만 되어있는 상태인 전교조시국선언 형사사건, 교육청의 항소로 2심을 준비 중인 일제고사 해임 교사 사건, 역시 항소심 중에 있는 서울시 교육감 선거 형사사건 정도가 있겠다. 

정말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네요. 주변 분들의 말씀처럼, 잠깐 뵙는 동안이지만 김진 변호사님의 넘치는 힘을 느낄 수 있는데요, 김진 변호사님을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게하는 동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외모를 두고서 하는 소리인가?(웃음) 특별히 열정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민변이 재미있어서 한다. 많은 변호사들이 민변 변호사가 되기위해 변호사가 된다고들 한다. 더 많이 못해서 아쉬워하는 마음, 나 역시도 그런 것 때문에 활동하고 있다.

매번 변호사님을 만날 때마다 드리는 질문입니다. 김진 변호사님이 민변활동을 해나가는 데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가치는 무엇입니까?

다른 변호사님들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나? (설명을 듣고) 글쎄, 앞선 인터뷰에서 좋은 말씀을 해주셨던 변호사님들과는 달리 나는 딱히 그런 것은 없는 것 같다. 굳이 말한다면 ‘닥치면, 최소한은 하자’이다.



김진 변호사님의 대학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떤 계기로 민변변호사로 활동하게 되셨나요?

대학시절, 특별한 것은 없었다. 상근 변호사인 송상교 변호사와 같은 서클활동을 하기도 했다. 다만 다른 민변 변호사들과는 달리 운동권에 좀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4학년까지 진로를 두고 방황하다가 사법시험을 준비했고 변호사가 되었다. 애초에 검사가 되겠다는 꿈이있었으나 연수원 생활을 하며 실망한 부분이 있었고 앞서 말한대로 민변변호사가 되기 위해 변호사가 된 케이스에 속하게 되었다. 민변 활동이 재밌어보였다. 이런 활동을 하는 전문가 집단,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변호사 생활을 하신지 10년차를 넘기셨다 들었습니다. (12년차) 특히, 민변과 함께 했던 지난 변호사 생활에 대해 간단한 소회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최근 민변 사무실에 로스쿨 학생들이 드나들며 실습을 하고 있는데 선배로써 법조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해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로스쿨 시스템에 대해선 잘 모른다. 다만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연수원 시절부터 ‘이제 변호사 되면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다’, ‘변호사 좋은 시절은 다 갔다’는 등의 말을 많이 듣게 될텐데, 실상 나는 예전보다 더 영역이 다양해지고 활동의 폭이 넓어졌다고 본다. 새로운 시대로의 전환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민변에서의 활동을 통해 오히려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 같다. 아쉬웠던 것은 능력있는 회원들이 민변활동에 있어서는 역량만큼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왕하는 것, 좀더 프로페셔널하게 활동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날씨가 몹시 추워졌습니다. 추운 날씨를 견디는 김진 변호사님만의 요령이 있나요?

내복이다. 나는 11월부터 6월까지 내복을 착용한다. 어려서부터 내복을 입지 않았던 적이 없었는데, 추위를 이기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한다.



2010년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나가는 민변의 뉴스레터입니다. 개인적인 새해의 소망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0년 째 바뀌지 않는 소망이 있다. “돈 좀 벌고 살 좀 빼자.”(웃음) 사건을 다루는데 개인적으로 나태해지고 소홀해지는 측면이 있는데 올해에는 내가 활동하는 노동의 영역에서 힘을 다해 활동하고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쉽게 포기하는 습관이 생겼는데, 주변에서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쉬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쉬지 않고도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민변의 회원 분들과 뉴스레터를 구독하는 일반 독자들에게 간단한 새해인사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구글에 가면 이명박 대통령 퇴임 카운트다운 위젯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미워하라는 말이 아니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모두 같이 분발했으면 좋겠다.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쉽지만 대안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글_오대양 (3기 인턴)
사진_강진향 (3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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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1 16:48 2010/01/1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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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더불어 누리고 싶습니다” - 조영선 변호사


가볍지 않은 걸음이었지만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웃음이 복을 부른다했던가. 말쑥한 회색 수트에 호인의 미소를 갖춘 조영선 변호사와의 첫 만남에는 입이 즐거울 일 또한 따랐다. 일과 가정에서 유쾌한 일들이 연이었다는 그였지만,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불편함’ 또한 잊지 않았다 하는데. ‘더불어 가자’ 함이 아름다운 그를 뉴스레터가 민변 사무실에서 만났다.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민변에서 기획위원회 위원장, 대외협력팀장, 사무처장을 겸하고 있다. 미군문제위원회, 노동위원회 위원인데 노동위원회에는 요즘 못나가고 있어 미안하다.


정말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계십니다. 특별한 연유가 있었나요?

특별한 연유는 없다. 학생 때부터 가져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 혹은 책임들을 가지고  ‘당연히 해야하는 일들이다’는 생각으로 활동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번 위헌제청결정에 대해 말씀부탁드립니다. 어떤 부분에 문제제기 하셨었나요?

범민련 사건을 함께 담당하는 변호사님들과 함께 이루어낸 성과다. 특별히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부분인데, 이 기회를 통해 잘못된 관습을 고치게 되었다. 기존 규정상 감청 허가 규정이 ‘2개월을 연장할 수 있다’라고 애매하게 되어있어 수회 연장시키는 잘못된 관행 남아있었다. 무려 30개월까지 하나의 영장으로 감청기간을 연장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수사기관의 개인 사생활의 침해라는 관점에서 분명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크게 쟁점이 되었던 부분이나 첨예했던 사안이 있었다면요?

‘패킷 감청’의 부분이었다. 패킷 감청은 망사업자의 회선에 직접들어가 감청하는 행위로 실시간으로 감청이 가능하다. 개인 이메일 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감청 영장과 문제가 달랐다. 증거를 찾지 못하고 심증만으로, 인정도 부정도 않는 검찰과 얘기해 나가야 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다.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여타 사건들에서 감청이 수차례 연장된 사례들이 발견된다면 이를 바로 잡는 작업이 바로 필요할 것이다. 계류 중인 재판에서도 위헌여부 결정 때까지 유보하도록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 것이 가장 직접적인 여파이고. 장기적으로 애매한 법규정 자체의 개정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2개월이 너무 장기간이라는 점과 수차례 연기가 가능하다는 점이 특히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패킷 감청의 문제점인 제3자의 사생활 침해 부분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사무실의 경우, 단체 전체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민변의 변호사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밟아오셨을지가 궁금합니다. 대학시절의 조영선 변호사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어렵다.(웃음) 시골 출신이라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느끼는 충격이 몹시 컸다. 84학번이 공유하는 대학생활, 그대로를 살았다. 처음엔 문학회 활동을 했다. 그러다 시의 나약함을 느껴 사회과학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군대를 다녀와서 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었다.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몰락은 나를 비롯한 나의 세대들에게 심한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회사에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같이 사법시험에 도전해 변호사가 된 케이스도 있지만 드물었다. 그때 함께 투신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잘되진 않았다. 늘 그들에 대한 불편함을, 부채 의식을 안고 있다. 그만큼 더 나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고 있다.


변호사님이 인생에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엇인가요?

한 단어로 말한다면 ‘더불어’라고 말하고 싶다. 혼자서 누리는 행복도 좋지만 함께 누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 덜 먹더라도 서로에 희망이 되어주는, 관계 속의 애정을 느끼며 살고 싶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더라. 개인이 해야 할 여러 몫이 있는 것 같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민변에서 나의 역할을 하고자하다보니 더불어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겨울이 왔습니다. 변호사님만의 겨울나기 요령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세요?

요령이라기 보단 한동안 푹 쉬고 싶다. 다행히 한동안 재판이 없을 예정이다. 기회가 된다면 다 훌훌 털고 절에라도 들어가 사색에 빠져들고 싶다. 너무 번잡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둘째의 돌잔치가 곧 있다고 들었습니다.

가정을 위해 스스로 조금씩 변화시켜가고 있는 중에 있다. 늦둥이 둘째를 보며 애틋해지곤 한다. 사십대 중반에 본 아들이라 내가 환갑이 되어도 겨우 중학생,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민변 뉴스레터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올 한해 행복하셨습니까?(웃음)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인가 싶다. 그런만큼 민변의 역할이 있는 듯하다. 많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 꼭지, 한 부분만 맡아서 함께 노력한다면, 그렇게 나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글_3기 인턴 오대양
사진_3기 인턴 이유선

2009/11/30 17:44 2009/11/30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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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라 하기엔 차갑고 겨울비라 하기엔 이른 비가 내리던 날, 법무법인 시민 사무실에서 고윤덕 변호사님을 만났다. 서로 처음 해 보는 인터뷰에 너무 긴장했던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하지만 사무실에서 여자 셋이 모여 질문하고 답하는 사이, 부담감과 긴장감은 금세 사라지고, 서로 크게 웃으며 즐겁게 질문들을 던지고 답했다. 간결하고 탁탁 던지는 듯. 하지만 딱딱하지는 않은 말투. 인터뷰의 질문에 당당하고, 자신의 뚜렷한 신념을 보여준 고윤덕 변호사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오늘 나눴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떠올려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이 분은 정말 ’타고난 민변’이구나. 하고.



>민변의 신입회원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민변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변호사로서의 사회에 대한 책임감. 사회활동을 통해 내가 공부한 것들을 나눠주어야겠다고 생각했고, 변호사가 되면 민변활동을 해야겠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가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은 있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아무래도 처음 마음과 같이 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고, 공익활동을 모여서 하면 좋잖아요.


>민변의 12개의 위원회 가운데서도 노동위를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연수원 수업에서도 노동법 공부를 했었고, 사법고시 과목 선택을 할 때도 노동법을 선택했어요. 같은 사무실에 계시는 강기탁 변호사님이 변호사가 풀어주는 노동법 책을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데, 2주에 한 번하는 스터디에 와 보라고 하셔서 몇 번 갔다가 노동위원회까지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노동위에 계신 모든 분들이 정말 훌륭하고 아는 것도 정말 많으세요. 매주 수요일에 중국집에서 하는 노동위 모임이, 정말 진지하시더라고요.


>민변에서의 1년을 돌아본다면?

‘이럴 줄 알았다.’ 내가 공부가 부족했던 것들 때문에 고생할 줄 알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런데 1년 동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어요. 어려운 점들도 있었지만. 그런데,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촛불시위 관련재판을 변론하고 계신데요.

사실 제가 진행했던 촛불재판이 그렇게 큰 건 아닌데… 민변을 통해서 받으면 당사자가 된 느낌이 들어요. 신경이 쓰이죠. 사실 우리(변호사)는 대리인인데. 당사자와 대리인 사이에는 온도차이가 있는데. 분명 촛불재판이 특수성은 있어요. 물론 대리하는 입장에서는 쉬운 게 없죠.


>고윤덕 변호사님의 학창시절이 궁금합니다.

학창시절이라면 언제를 말하는 건가요? 대학생 때? 특별히 말할 것은 없고요. ‘시의적절 하다’는 말을 하잖아요. 전 그런 게 없었어요. 남들은 다 미팅할 때, 저는 다른데 가있고. 남들은 공부해볼까? 하는 때 저는 다른 거에 빠져서 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가서 타이밍이 잘 안 맞죠. 인생의 타이밍? 대학교 1,2학년 때는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좋아서. 지금은 여러 봉사활동 동아리 많잖아요. 제 때만 해도 그런 게 별로 없었는데. 장애인운동 하는 동아리, 법대 철학회 하면서 여기 저기 다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3,4학년 때는 그 때는 검도한다고, 운동한다고 법대 신문 만든다고 다니고. 공부는 좀 늦게 시작했죠. 4학년 때. 전혀 타이밍이 안 맞죠. 1,2학년 때는 사람들과 같이 놀았는데. 3,4,학년 때는 혼자 놀았다고 해야 하나?


>사진에도 흥미가 있으시고, 잘 찍는다고 하시던데요.

아마도 카메라를 보고 그런 것 같네요. 그냥 남들처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요즘 사진 찍는 거 취미로 많이 하잖아요. 저라고 별로 특별할 것은 없지요. 남이 잘 하지 않는 것을 한다고 특이하게 보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젊은 여자들 가운데 등산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등산 다니다 보면 많이 만나요. 누가 이렇게 등산열풍이 불 줄 누가 알았나요? 특이하다 싶은데 나중에 보면 비슷한 사람들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있더라구요.





>항간에서는 시민 김선수 변호사님과 주말마다 산행을 가시는 것을 보고, 신입변호사라 차마 못가겠다는 말을 못해서 따라가는 것 아니냐고 안타까워하는 분도 계셨는데, 산을 좋아하셨던 거였군요.

항간에서는, 이건 거의 자백인데.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채용이 된 거다. (웃음) 좋아해요. 주말엔 약속도 없고. 산에 안 가면, 주말이 그냥 기록 하나 싸들고 집에 가서 뒹굴뒹굴 하다 끝나더라고요.


>전국 방방곡곡 중 어디가 제일 좋으셨어요?

한라산 좋았고요. 주왕산도 좋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저에게 지금은 단풍의 계절이거든요. VJ특공대 같은데 보면 단풍철에 단풍산행 하면서 태극기 펄럭이고 이런 거 있잖아요. 예전에는 ‘왜 그러나.’ 그랬는데 가보니까 좋더라고요. 


>최근에 다녀오신 곳 중 에서는 어떤 곳이 좋았나요?

다 다녔다니까요. 영남 알프스도 가고, 지리산 둘레길도 다녀오고. 일주일에 한 번씩 다녀요. 그러니까 주말에 다른 약속이 없는 거죠. (웃음)


>지리산을 씩씩하게 완주하셨다고 황희석 변호사님이 깜짝 놀라셨다는데요. 체력도 좋으신 것 같아요.

천천히 가면 돼요. 사실 저는 혼자 가는 걸 좋아하는데, 요즘 함께 다니는 분들 평균연령이 50대. 그 점이 조금 안타깝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서 나가세요. 하지만 저는 제 페이스대로 천천히 가면 됩니다. 


>굉장히 매력 있는 분인 것 같아요. (강진향 인턴) 그런데 왜 아직 미혼이신지? (장연희 간사)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십시오? 그냥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까? (웃음)


>나름 이 뉴스레터 많은 사람들이 보거든요. 혹시 공개PR 하실 계획 없으세요? ‘이렇게 멋진 여자다’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