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이야기/외부기고'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8/11/28 MINBYUN_NE 경제는 수학인가? 갱제인가? (1)
  2. 2008/11/17 MINBYUN_NE 2004년, 그리고 2008년의 국가보안법
  3. 2008/11/10 MINBYUN 꼴뚜기, 망둥이, 에라이 주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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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황희석 변호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격주로 화요일마다 개최되는 공부모임에 들어갔다. 이번 주는 때가 때인 만큼 "케인즈 & 하이에크 : 시장경제를 위한 진실게임"이라는 책을 다 같이 읽은 책으로 선정하였었다. 케인즈는 1929년 대공황을 극복하고 자본주의가 번성하도록 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를 경제학자라고만 정의하는 것에 대해 이견을 가진 사람도 많은 것 같은데, 그가 철학이나 정치, 인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박학다식의 표본이라 여기기 때문으로 보인다. 잘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점이 있다. 그리고 하이에크 역시 경제학자라는 제한된 딱지로 분류하기가 부족하다 생각될 정도로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를 갱생하도록 하는 데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케인즈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대공황부터 2차대전을 거쳐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자본주의가 소위 황금기를 누리던 소위 케인즈주의의 승리라고 지칭되던 시절에도 자유방임 또는 시장의 우위를 내세우는 주장을 일관되게 부르짖으면서 케인즈주의에 맞서 지속적으로 사상투쟁을 벌여왔고 결국에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30여년간 지구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데 1등공신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지금 전 세계 차원의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이 두사람 중 누가 궁극적으로 옳은가, 그리고 누구의 정책을 취할 것인가가 일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내 친구 중에는 아주 썩 괜찮은 경제학자가 있다. 썩 괜찮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지만, 지적인 면모에서나 사람됨됨이 면에서 나로서는 따라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있다는 다소 질투어린 생각이다. 흔히들 경제학자들을 두고 타칭은 별론하더라도 자칭 천재라고들 하지 않는가? 케인즈와 하이에크에 관한 책을 읽기 직전인 2주전 주말 나만 빼고는 전부 경제학도들인 이 친구와 다른 친구 2명과 함께 가까운 산에 산행을 하게 되었다. 비록 나머지 2명의 친구는 지금은 경제학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이들이 전부 경제학도들이라는 점이 경제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고 공감의 영역이 적을 수밖에는 나로서는 못내 다소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만난 철 없던 열혈학도(?)들이 이제껏 인연을 맺고 산을 같이 타고 아직도 못다 한 얘기들이 있어 한참을 재잘대는 것은 참으로 기꺼운 일이다.


을 올라가는 도중 자연 미국발 경제위기가 주제가 되었는데 멋모르고 내가 "그것 1929년 대공황의 확대판 아냐?"라고 물었다. 내가 대공황의 확대판이라 했던 것은 요즘 떠도는 "미국에서 짐바브웨까지"라는 말에서 풍기는 것처럼 각국의 경제적인 상호의존도가 엄청나게 확대되어 1929년 대공황이 미국과 유럽 일부지역에 심각한 결과를 낳았던 것과는 달리 전 세계에 미치는 파장이 훨씬 커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경제학도인 내 친구는 그 물음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그리고 단호하게 "대공황의 축소판이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마도 파장의 심도를 생각할 때 지금의 경제위기가 1929년 대공황 때의 그것에 비해 작다는 측면을 얘기하였거나, 아니면 1929년의 위기에서 배운 자본주의 각국이 몸을 사리면서 적절히 조절하는 기법을 지금은 사용할 것이라는 기대에서 나온 말이지 않을까 미루어 짐작한 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정말 조족지혈이니 어쩌랴.


그런데 며칠 전 다시 케인즈와 하이에크를 읽으면서 깨닫게 된 새로운 사실은 이들이 엄청난 가치지향적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맑스로 대표되는 것처럼 대개 자본주의에 반대하거나 그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무슨 엄청난 주의(ism)에 사로잡혀 그 가치나 대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위해 작위적으로 어떤 생각이나 방안을 만들어내는 가치중립적이지 못한, 그래서 편견과 좁은 시야를 가진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케인즈나 하이에크 같은 생각의 소유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며, 편견과 선입관에서 벗어나 생각의 평온 속에서 자유지성을 노래하는 사람처럼 비춰지고 있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러나, 내가 이책을 통해서 본 케인즈나 하이에크는 엄청날 정도로 자본주의에 대한 집착과 수호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여기에서 조금만 벗어나려는 시도나 생각의 뿌리에 대해서도 강렬한 적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의 예측보다는 자본주의는 영원해야 한다는 도덕률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어떤 지식이나 행동이 일정한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동떨어진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라는 고답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위기에 대한 해법을 두고 다시 케인즈와 하이에크의 논쟁을 생각하고, 하이에크의 방책을 주장하던 분위기에서 슬금슬금 발을 빼 케인즈로 다시 돌아간다고 우리가 찾는 해법이 나올 것인지 나로서는 의문이다. 케인즈는 자산과 실물의 가치가 폭락하였음에도 구매자가 생기지 않는 대공황에 직면하여 그 동안 공급의 조절을 통해 공황을 피하려던 방책이 쓸모없음을 파악하고 부족한 유효수요, 곧 구매할 수 있는 소비자의 능력을 인위적으로 창출함으로써 공급과 수요의 선순환구조를 되살리고자 했다. 의학적인 표현을 도입해서 설명하자면, 심장박동이 멈춘 환자에게 강한 전기쇼크를 가하여 심장박동을 되살리는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그 유효수요라는 게 말이 좋아 유효수요지 결국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수요, 돈을 찍거나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노동가치의 창출일지니 일시적인 방법은 될지언정 그것이 무한정 반복될 수 있는 치료방법은 아니지 않은가?


2차 대전으로 처참하게 붕괴된 자본주의 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과 서유럽 중심의 자본주의 사회는 내부적으로는 엄청날 정도의 경기부양책을 수시로 그리고 만성적으로 사용해 왔고, 외부적으로는 제3세계나 후진국에 대하여 많은 돈을 지원하는 원조정책을 취해왔다. 이러한 정책의 기저에는 소득의 양극화, 일상적이고 정기적으로 찾아드는 공황과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현상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급속하게 성장하며 세를 확대하던 사회주의를 봉쇄하기 위한 냉전에서의 승리전략이었다. 한반도의 남쪽은 소련, 중국, 그리고 북한이라는 사회주의권과 코를 맞대고 있는 지리적 여건에서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을 등에 엎고 원조를 받으면서 경제성장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성장을 누려왔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자본주의도 1970년대 중반과 말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되었는데, 미국은 군비경쟁으로 인한 재정적자와 제조업의 붕괴로 인한 만성적인 무역적자, 그리고 달러화가 기축통화라는 잇점을 이용하여 이들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취한 통화증발정책의 남발로 인한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성장의 침체가 그 징후들이었고, 아마 소련과 다른 동구의 사회주의권이 내부적인 개혁과 정비에 조기에 착수하고 소련이 미국과의 군비경쟁을 자제하며 아프간참전과 같은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붕괴되기 전 미국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나가 떨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들이 제 스스로의 무능과 부패, 비효율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것이 미국이나 서구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것이었겠는가?


1990년 초반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자 미국의 서구 자본주의는 그 동안 제3세계나 후진국에게 살랑대던 개꼬리를 더 이상 살랑댈 필요가 없었고, 당장 자신들의 주머니부터 챙겨야 겠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하였으니 그러한 방향전환, 정책선회의 사례는 무수하다. 원조는 중단되거나 급격하게 감소되었고, 제3세계와 후진국에 어느 정도한 관대한 관세정책을 포함하고 있던 GATT체제는 곧바로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체제로 들어가 1995년에 WTO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미국과 서유럽으로 이민을 막기 위한 장벽은 한층 더 높아졌다. 1995년 WTO체제가 출범하기 직전까지 원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도 곧바로 피원조국가에서 제외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몇 개 도시에 설치되어 있으면서 각종 후원과 장학사업을 벌여왔던 미문화원이 전국에서 일거에 사라진 것도 이 무렵이다(혹자는 미문화원이 1985년과 그 이후 1980년대 말까지 몇 차례 운동권 학생들의 점거 때문에 없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던데, 그 진실한 배경은 그와 다르며 폐쇄시점도 바로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이 무너진 직후임을 잘 새겨볼 필요가 있다). 1993년에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OECD에 가입하면서 마치 이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인 것처럼 떠들어댔고, 세계화라는 구호가 온나라를 뒤덮기 시작했던 것도 이 무렵이니, 곧 우리는 냉전이 끝난 세상에서 새롭게 질서를 재편하려는 자본주의 열강 앞에 제발로 나서서 사냥개처럼 변죽을 맞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곧바로 미국과 서유럽자본주의는 그 동안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때문에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던 naked한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기 시작하는데, 투자와 개발을 빌미로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으로 자본은 급속히 이동하였고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강렬한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것이 바로 몇 년 지나지 않아 동남아각국과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외환위기였다. 그렇게 흥청망청하던 돈이 그 다음으로 이윤을 찾아간 곳은 IT였고, 거기서 재미를 빼고 재빠르게 빠져나온 자본은 이제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갔으며, 규제의 완화와 철폐를 틈타 세계 곳곳에 돈놀이 마당을 만들었다. 이 과정을 보면 자본은 실제 가치가 창출되는 노동이 있는 곳에서 점차 멀어져 허황된 숫자의 증식만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2001년 9-11사태가 발생하자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선 미국과 영국은 군수산업과 천연자원의 지배에서 이윤을 올리고자 혈안이 된다. 그리고 그 허황된 풍선이 이제 터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몰락한 하이에크 앞에 다시 케인즈가 부활할 수 있을까? 나로서는 수긍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논의되는 금융산업구제안, 자동차산업지원방안, 한국에서는 논의되는 건설회사 지원방안 같은 단기적인 부양책이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나는 그마저도 믿을 수 없다) 도리어 거품을 더 만들고 부풀어 오른 풍선에 더 많은 공기를 불어넣어 더 큰 규모의 폭발을 조장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게 경제학의 가나다도 모르는 내가 갖는 상식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의 자본주의는 탐욕의 크기만큼 비대해질대로 비대해졌고 상호의존도는 너무도 커졌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나 GM, FORD, CHRYSLER 같은 몇 개 회사의 매출이나 자산이면 웬만한 나라 수십개의 GNP와 맞먹는데, 이들 회사가 무너지는 경우 그 파장은 어떠하겠는가? 무엇보다 전 세계의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탐욕의 달리기 경주에 휩쓸려 들어가 이제는 각자도생의 길만을 찾고 있는 마당에 신자유주의정책이건 아니면 유효수요창출정책이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 줄 수 있을 정도로 공적인 신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부모임을 앞두고 숙제삼아 그 책을 읽으면서 부산출장을 간 김에 누이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도중 누이의 딸, 그러니까 나한테는 외조카가 되는 애로서 학교성적으로는 출중한 고2가 있는데, 내년 대학진학을 앞두고 여러 선택과목 중 경제를 뺐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왜?라는 물음에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경제가 지나치게 수학, 아니 산수 위주로 교재와 시험이 구성되는데, 조카는 이런 것을 싫어해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바로 24년 전 내가 처했던 선택사항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 역시 공부 좀 하면 경제학과를 지망하던 그 영향 아래 있던 터라 고3때 '너는 무슨 과 갈래?'라는 담임선생님의 질문에 순진하게(?) '경제학과요'라고 답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내 몸 유전자나 호르몬의 작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막상 법대로 진학하여 대학 1년 때 교양과목 필수인 경제학개론을 들으면서 그 오묘한 수요와 공급의 논리(?) 앞에 느낀 절망과 경제학을 선택하지 않았기를 잘했다는 자찬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 인생의 선택 중 가장 잘 한 것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 대학진학시 경제학과를 가지 않은 것이 들어갈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경제학은 국외자인 내가 어설픈 눈으로 보기에 숫자놀음에 기울어진 경향이다. 물론 숫자를 경시하거나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적어도 통계는 일정한 판단의 준거자료로 쓰임새가 남다르고, 일종의 사실(FACT)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소위 근대화 이전 사회전체적으로 이런 통계나 숫자, 그리고그에 기초한 과학을 등한시함으로서 우리가 느낀 비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과학으로서 또 통계와 수학으로서의 경제학이 가지는 의미를 마냥 내팽개칠 수는 없다.


러나 통계나 수학, 숫자에 기초한 경제학은 인간 세계에서 사후적인 논평의 줄거리이거나 이를 뒷받침하는 FACT일 뿐 그 자체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법칙으로서의 과학을 말해주기에는 부족하다. 경제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추적해 보자. 경제를 지칭하는 영어단어인 Economics는 효율을 의미하는 economy에 그 어원이 있지만, 동양에서는 經世濟民, 곧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가지런 하게 한다는 문구에 그 어원이 있다. 곧 서구 자본주의는 경제를 이해함에 있어 나를 중심으로 한 어느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경제학이 커온 반면, 동양에서는 나라 살림을 살찌우고 백성의 배를 불리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경제를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닐까?

잘 모르지만, 경제학도가 되어 처음 배우는 것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 그래프 같은 미시경제학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케인즈주의 같은 소위 거시경제학인데, 한 인간의 욕망(수요)과 이를 채워주는 것(공급)을 중심으로 경제학을 풀어나가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내 욕망, 너의 욕망, 또다른 제3자의 욕망...그리고 이를 채워주는 수많은 공급자들의 공급...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면 자본주의 경제학은 있는 현상에서 분석적이고 수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뿌리를 잃었고, 그 결과는 허무맹랑한 사후적 평가나 평론만을 만들어내는 학문으로 스스로를 굴복시켰다는 생각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 반대를 생각하면, 만약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경제사를 공부해야 하고, 경제사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통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최소한 정치경제학은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미네르바의 예측과 분석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나로서는 별 관심이 없다. KOSPI지수 500, DOW지수 5,000이라는 예언은 나 스스로 어떻게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단비같은 존재이지만, 혼자만 위험을 면하려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이 우리의 주류적인 사고인 이상 이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이 내 예언이다.


문명이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데릭 젠슨의 주장이 예전에는 그냥 흘러지나가는 경구였지만, 이제는 살갑게 들리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경제학은 죽었다. 아니 죽어야 한다.
 

2008/11/28 11:21 2008/11/28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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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를 변호하면서
2004년 8월 6일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의 지인으로부터 두장의 사진이 담긴 이메일이 날아왔다. 사진은 송교수 부부가 독일에 도착하여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었다. 11개월 만에 다시 꿈에 그리던(?) 독일 땅을 밟게 된 것이다. 참 묘한 생각이 들어 작년 9월22일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던 송교수 가족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역시 웃는 얼굴의 송교수와 가족들이 그 속에 들어있다. 정말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37년만에 밟는 감격의 순간이다. 똑같이 송교수와 부인이 한껏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데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노라니 괜한 서글픔이 스며든다. 사진 속의 송교수는 비록 웃고 있지만 작년에 비해 훨씬 깊은 아픔의 상처를 감출 수는 없다. 지난 11개월은 부푼 가슴안고 귀국한 송교수를 정말 할퀴고 지나갔다. 마치 무시무시한 괴물이 송교수를 집어 삼켜 11개월 동안 온갖 상체기를 내며 고통을 주다가 갑자기 입 밖으로 내뱉어버린 느낌이다. 세상 밖으로 나온 그는 비록 웃지만 그 동안 받은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그 상처에 대해 생각한다. 송교수가 입은 상처, 부인과 자식들의 고통, 절망감에 눈물짓던 지인들, 국가보안법의 시퍼런 서슬에 가위눌려 잔인하게 난도질 당하는 모습을 그저 두려움에 지켜보기만 했던 많은 학자들에게도 이번 사건은 깊은 상처를 남겼다. 나 역시 시간에 쫓겨 치료를 미루다 결국 어금니를 잃었다. 그러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송교수 자신이다. 그리고 송교수에게 상처 입힘으로 인해 민족통일의 가능성이 훨씬 멀어졌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가 입은 상처가 가장 크다. 내가 이 사건을 가장 안타깝고 애닯게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북 양측 정부는 수십년 동안 자기 국민들에게 상대방에 대한 왜곡 선동을 계속해왔다. 어린 시절 북쪽에는 머리에 뿔난 붉은 돼지가 지배하는 사회로 알고 있었다. 사정은 북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든 민간인이든 서로에 대해 신뢰는 눈꼽만큼도 없고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기에 바빴던 것이 우리의 과거다. 그런 비상식이 지배하는 시기에 송교수는 민간차원에서 남북간의 교류에 물꼬를 처음으로 튼 사람이다. 그는 1989년 독일의 통일과정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 체험으로 통일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과 북이 서로를 잘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송교수는 1990년대 중반 남북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북쪽 학자들의 10가지 요구 중 5가지는 북쪽 학자들을 설득하여 포기시키고, 나머지만을 남쪽에 요구하도록 만들었고, 남쪽 학자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고 진술한다. 학자들간에도 서로 불신이 워낙 높아 학술회의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기 보다는 헐뜯고 비난하는데 더욱 관심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교수가 양측 중간에서 조율하여 결국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고, 소위 ‘지뢰밝기’과정을 통해 서로하지 말아야 할 발언을 솎아내고 이성적인 토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 끝에 양측 학자들은 스스로의 오해를 조금씩 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학술회의가 2003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영향으로 이제 학자들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경제 등 다양한 분야까지 민간교류가 확대되었다. 민간차원의 교류는 남북을 서로 이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정부간 교류를 촉진시켜 정상회담이라는 성과까지 가져왔다. 송교수가 그런 중간 매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37년간의 노력 때문이다. 그는 오랫동안 남한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남한출신이고,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하여 이미 남한에 많은 학문적, 혈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70년대부터 북한을 드나들며 북한 학자들과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하면서 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는 누구든 그의 강의를 듣고자 했고, 그로부터 혜안을 얻고자 하였다. 세계적 지성인이 남과 북 양쪽에 관계를 맺으면서 매개자로 역할하는 것은 교류에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그 결과 남과 북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송교수를 신뢰하고, 의지했던 것이다.


변론을 위해 송교수의 생각과 활동을 낱낱이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 통일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고 무릎을 탁치게 되었다. 동양인으로는 처음이라 할 정도로 어려운 독일교수시험을 통과하고, 세계지성이라는 하버마스의 뒤를 이을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명성을 얻은 학자가 처벌을 감수하고 북한을 방문하고, 북쪽 학자들과 교류를 시작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통일을 위한 헌신이고, 희생이었다.

 
이 모든 희생과 헌신을 국가보안법은 완전히 짓밟았다. 그의 진정한 의도가 어디에 있든 그 과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국가보안법은 무조건 북한으로의 방문과 북쪽 사람과의 접촉, 북쪽 단체의 가입이라는 결과에만 촉각을 곤두세운다. 진정으로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열중한다. 국가보안법이 북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국시로 삼고있던 전시상황에서 임시법으로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는 북한을 빌미로 권위주의 정권의 안보수단으로 악용되기만 하였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은 현재 그 날카로운 발톱을 잔뜩 웅크리고는 있지만 사실은 북한에 대한 무력통일을 전제로 활동하는 법이다. 그래서 국가보안법과 다른 주장을 용납할 수 없어 처벌하며, 독재권력에 대한 비판도 북쪽의 주장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무조건 처벌한다. 그 결과 독재권력에 대해 한마디 비난을 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위협에 몸을 떨어야만 하고, 권위주의 정부를 찬송하는 것 이외 다른 주장은 일체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온 국민의 머리 속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보안법은 민족통일의 앞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며, 남한의 온 국민의 생각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괴물이었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고향방문도 못하면서도 견결성을 잃지 않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 그 헌신성에 감복하여 변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이 깊이를 더해가고 쟁점이 명확해지면서부터는 민족통일을 위해 지금까지 송교수가 해온 역할은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를 구해내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절대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이 전제하고 있는 북한에 대한 규정은 전혀 사실과 다르며, 송교수에게 덧씌워진 혐의는 믿을 만한 증거가 하나도 없는 거짓말이란 증거를 찾기 위해 온갖 구상을 다해야 했고, 수십명의 북한, 철학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며 뜬눈으로 지샌 밤이 갈수록 늘어갔다. 변호인들은 각자 맡은 부분에 대한 변론을 위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고, 서로 격론을 벌이며 누명을 벗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심 법원의 결론은 예상했던 것처럼 변호인들의 완벽한 패배였다. 그것은 국가보안법과 억압질서의 완전한 승리와 민족통일의 요원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속도에 속도를 더해 달려가는 중에 갑자기 엄청난 벽에 꽝하고 부딪힌 듯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1심재판의 과정과 결과는 국가보안법을 나 자신의 문제로 만들었다. 더 이상 의뢰인 송교수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과거를 부끄럽게 만든 역사의 문제이고, 온 국민의 머리 속을 통제해 온 국가보안법의 문제이기에 이제 이 싸움은 나의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2심에서 송교수의 주요 혐의는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이런 사건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지금 송교수가 한국에 없더라도 내가 국가보안법과 싸우며 법정안과 밖에서 더욱 치열하게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국가보안법이 생존하는 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통일은 단 한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상 같은 하늘아래 국가보안법과 함께 숨쉴 수가 없다.
 

작년 9월 송교수가 귀국하여 국정원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노동당 입당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여론은 싸늘하게 등을 돌렸다. 평소 친근감을 갖고 있던 학계, 정치계 등의 지인들과 민주인사들까지도 송교수를 외면하였다. 우리 안의 자기검열장치가 다시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우리 머리 속에 바로 이런 반응을 하도록 프로그램된 칩을 심어놓은 것이다. 소수의 변호인들과 지인만이 송교수 곁을 지키게 된 당시 나는 한장의 편지를 사람들에게 보냈다. “사실이 어떤 것이든, 송교수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든, 그는 지금 발가벗겨진 채 칼바람 속에 혼자 내버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있고요. 그에게 기댈 언덕이 필요합니다. 언덕이 되어주십시오.” 송교수가 석방된 지금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번 호소해야 한다. “반세기 동안 우리를 고통 속에 신음하게 한 국가보안법이 이제 벼랑 끝에 서있습니다. 그를 영원히 잠들게 하기 위해 조금만 더 힘이 필요합니다. 그 힘이 되어주십시오.”

 
이 글은 송두율 교수의 변호를 맡았던 송호창 변호사가 2004년 8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그리고 4년이 훌쩍 지난 2008년. 오늘까지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은 '악법'들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2008/11/17 12:11 2008/11/17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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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로 권력을 잡은 강자가 법과 제도도 아랑곳없이 그동안 먹은 것 다 토해내라고 온갖 곳에서 아우성이다. 전에도 강자는 있었고 약자의 저항을 받기는 했지만 돌아온 강자만큼 염치없지는 않았다.
[38호] 2008년 06월 03일 (화) 12:15:33 송호창 (변호사)
   
송호창
요즘 새로 권력을 잡은 강자가 법과 제도도 아랑곳없이 그동안 먹은 것 다 토해내라고 온갖 곳에서 아우성이다. 전에도 강자는 있었고 약자의 저항을 받기는 했지만 돌아온 강자만큼 염치없지는 않았다.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법은 ‘강자의 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그래서 사실 나는 법을 무지하게 싫어한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아마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법 시대 이래 근대에 이르기까지 선거권은 재력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남자만이 독점했다(그래서 나는 힘센 남자도 싫어한다). 

선거권은 현대에 와서 모든 성인 남녀에 허용되었지만 법의 속성과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전혀. 대부분의 법은 항상 사회적 강자에 의해, 강자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다. 사회 약자를 보호하는 법은 강자의 관심 대상이 아니거나 약자의 불만 폭발을 막기 위한 떡고물 정도로만 허용된다. 

이 모든 것은 사회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그래서 나는 권력을 제일 싫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회를 혐오하거나 염세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냥 ‘그게 나인걸’ 하면서 나를 사랑하며 살면 되고, ‘그게 세상인걸’ 하며 세상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강자에 대항해 약자의 몫을 더 늘리고, 법으로 보장되도록 애쓰면 된다. 만일 그 몫을 줄이려 하면 송곳니 드러내고 덤비면 된다.

그게 권력을 중심으로 도는 세상에서 약자가 살아가는 방식이고, 파업의 권리가 인정되는 것처럼 저항할 권리도 법으로 보호된다. 그렇게 약자의 저항이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강자가 한 걸음 물러서 수용해주면, 사회는 비교적 순탄하게 돌아간다. 반면 강자가 양보하지 않고 약자의 저항을 억누르거나 양보했던 것을 돌려달라고 앙탈을 부리면 소란이 생기고 사회는 조용할 날이 없게 된다.

요즘 한국은 정말 어지러울 정도로 시끄럽다. 새로이 권력을 잡은 강자가 양보는커녕 먹은 것 다 토해내라고 온갖 곳에서 아우성이기 때문이다. 집권하자마자 대통령 임명직 인사에게 옷 벗으라고 내몬 것은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그 다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산하 기관장들에게 노골적으로 나가라고 요구한 것부터는 눈뜨고 보기 민망했다. 꼴뚜기 다음에는 망둥이가 날뛴다고 했던가. 그 장관 수하 간부는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방송통신위원장의 사퇴 종용으로 안 되자, 권한도 없는 한국방송(KBS) 이사회를 동원해 한국방송 사장의 퇴임 결의를 위한 이사회를 소집하고, 감사원의 특별감사까지 끌어들였다. 그냥 그동안 먹은 것 토해내라고 생떼를 쓸 뿐이다.

   
ⓒ뉴시스
5월14일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돼 있다”라고 발언해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도연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왼쪽).

절대적 지지 얻은 대통령이 조롱받는 현실


돌아온 강자의 횡포는 사회 전 분야에 도미노처럼 일어난다. ‘횡포’라도 세련되면 봐줄 만도 하건만 낡은 인물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참으로 생뚱맞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고 하자, 난데없이 대한상공회의소라는 상인단체가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국가 수립 능력을 가졌는지 의문”이고, 이미 법적인 평가가 내려진 박정희의 긴급조치를 초헌법적 조처가 아니라며 교과서 내용을 고치라고 나섰다. 이제는 역사학자와  법률가들이 대한상의에 가서 재교육을 받아야 할 판이다. 이 모든 일이 지난 대선에서 도장 한번 찍는 일에서 비롯했고, 그렇게 당선한 대통령이 초·중등학생에게까지 조롱받는 현실이 놀랍고 서글픈 뿐이다. 정권이 바뀌기 전에도 강자는 있었고 그 강자도 약자의 저항을 받기는 했지만 돌아온 강자만큼 염치없지는 않았다. 꼴뚜기, 망둥이들. 노는 곳이 갯벌이라 하는 꼴은 뻘짓이다. 에라이 주꾸미!


 
2008/11/10 00:36 2008/11/1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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