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기고] 신성한 사명감이 아닌 멈추지 않는 의지적 행동으로(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활동기) / 최새얀 회원

2025-02-28 138

 

신성한 사명감이 아닌 멈추지 않는 의지적 행동으로

–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 활동기 –

– 최새얀 회원

 

저는 현재 소수자인권위원회 간사로서, 소수자위가 연대하고 있는 국가인권위바로잡기공동행동 집행부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실 소수자위의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 11월쯤이라, 그 이전의 인권위 활동에 대해서는 성명과 보도자료 등으로만 접했습니다. 막말과 소수자 혐오를 일삼는 인권위원들이 있고, 독실한 개신교신자인 사람이 인권위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간접적으로 들어왔을 뿐입니다.

그러다 작년 12월, 비상계엄이 터졌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장본인이 임명한 자가 인권위원장직에 있으니, 곧바로 비상계엄에 대한 규탄 입장을 냈을리 없습니다. 세계인권선언의 날인 12월 10일, 그러니까 비상계엄 선포 바로 일주일 후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세계인권선언 기념사를 진행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공동행동 집행위 사람들은 행사장에 찾아가 안창호에게 입장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우리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 때 처음 마주한 안창호 인권위원장은 비상계엄으로 발생한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국가인권위가 현재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발생한 상황들은 모두 잘 알다시피, 아무런 내용이 없는 성명 발표와 더불어, 사실상 내란죄 책임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호하는 안건이 상정되어 안창호, 김용원, 이충상, 이한별 등의 주도로 결국 통과됐습니다. 이에 대한 법적, 사회적 비판은 민변 홈페이지에 성명으로 대부분 드러나있으니, 이 글에서는 일련의 투쟁 과정을 겪으며 느낀 개인적인 소회를 밝히고자 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저에게는 양가적 측면이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학부 시절 인권활동을 하였을 때 인권위는, ‘인권’이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사실상 제도권 안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관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논쟁이 되는 인권 – 퀴어인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인권, 난민인권 등 –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닫는 ‘어쩔 수 없는 국가기관’ 정도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로스쿨 진학 후 안진 교수님으로부터 <차별금지법> 수업을 들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법에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개헌 논의에서도, 차별금지법 논의에서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성적 지향에 기한 차별금지’가 현행법에 들어가있다니, 그 때부터 국가인권위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졌던 것 같습니다.

법을 배우면서, 결국 제도권 정치와 정책, 기관들과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도 일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국가인권위원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회적 차별 문제를 이슈화하고, 의제로 제안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몫일 수 있겠지만, 결국 제도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공적 영역과의 지속적 교류와 협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민변에서 활동을 시작하고나서는, 제 생각보다도 인권단체와 국가인권위원회는 많은 업무를 함께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수용자인권 관련해서는, 국가인권위가 사법적 영역에서는 도출될 수 없는 유의미한 결정을 축적시켜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를 꾸준히 진행하여 성소수자운동의 방향성의 지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국가인권위원회는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와 국제사회의 권고로서 설립된 것이더군요. 특히 독재정치와 국가폭력으로 많은 희생이 있던 우리나라 역사에 비추어볼 때, 독립된 행정기관으로서 인권위는 그 설립 자체로 투쟁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가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더더욱 마음 아픕니다. 지금 국가인권위의 상황은 ‘현실의 문제’로 우리 머릿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알고 있던 관념적 국가인권위와 지금의 국가인권위의 괴리가 너무 커서 참 낯설 때가 있습니다. 김용원이 막말을 퍼부을 때, 국가인권위 건물에 극우세력들이 물들었을 때, 내란세력 비호 안건이 가결되었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물론 ‘상식’이라는 것은 어떤 주체에 의하여 구성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가변적이고도 다층적인 개념이지만, 그럼에도, 적어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공배수의 선이 무너진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그 최소공배수의 선을 다시 재건하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너무 뒤로 후퇴해버린 현실에 또 자연스레 우리가 적응해버리면, 우리는 또 언제 앞으로 나아가는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까요.

12월 비상계엄 선포가 윤석열 한 명의 일탈로 발생된 해프닝이 아닌 것처럼, 국가인권위도 단지 몇 명의 패악질로 망가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소외된 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 그 차별을 공고화하고 확산시키는 정치인들, 그 구조적 불평등에 편승해있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절망 속에서,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것만이 정답인 듯 합니다.

절망스러운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제 감정에는 절망만 남아있진 않습니다. 문제의 안건이 상정된 전원위원회가 열리는 날 한순간의 고민 없이 회의를 막고자 했던 사람들, 일주일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비상계엄 인권침해 진정서를 작성했던 사람들, 앞으로 인권위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며 요즘 저는 반성과 다짐을 반복합니다. 인권위를 지켜내야 한다는 신성한 사명감보다도, 인권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행태들을 가만히 앉아서 볼 수만은 없다는 ‘본능적 의지’ 그리고 ‘멈추지 않는 행동’을 매번 목도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국가인권위 그 자체 또는 미래에 인사권을 행사할 누군가가 아니라 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믿기에, 국가인권위원회가 다시 그 역사적 책임을 받들어 본분의 역할을 다하는 조직으로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저도 부족하게나마 함께 할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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